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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63

추전역 가는 길 길 위에 서면 나는 버릇처럼 그리움을 좇는 방랑자가 된다. 오늘도 나는 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누가 그 길을 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도 길을 찾아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한 때는 행복을 좇아 길을 떠나고, 또 한 때는 슬픔에 쫓겨 길을 떠났을 것이다. 가족들 모두가 선잠을 깨어 거리로 나왔다. 택시기사가 길을 막는다. 청량리역까지는 너무 멀어서 안 가겠단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한산한 길을 멀어서 안 가겠다니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아마 다섯 식구가 부담스러웠나 보다. 추전역 가는 길이 첫걸음부터 삐거덕거린다. 다른 택시를 탔다. "이렇게 길이 뻥뻥 뚫렸는데 멀수록 더 좋지요"라며 잠시 당황했을 우리를 달랜다. 길 위에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이렇게 길을 찾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다. 길은 사람.. 2023. 3. 22.
여보세요? 여보시오! "여보세요?" "누군교?" "여기는 00 고객센터인데요. 00님께서 전화요금이 육십이만구천 원 나왔습니다. "머라카노, 무슨 전화를 썼다는 말인교."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고객님의 전화가 문제가 생겼나 봐요. 경찰에 접수해 드릴까요.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니까요, 정확하게 파악해서 5분 후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라마 그라이소?"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는 얼떨결에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전화비라고 해봐야 고작 몇 만 원인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분이 1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가 왔다. "파악해 보니까 사기꾼이 전화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얼른 은행감독원에 신고해야 합니다. 통장이나 카드 분실.. 2023. 3. 7.
피맛避馬골 피맛避馬골 경복궁과 종로 사이 조선시대 대감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그 길에, 백성들은 대감들의 잦은 행차 때마다 고개를 숙이느라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나라님께서 백성들이 말을 피해서 뒷골목으로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말을 피해서 다녔던 그 길이 피맛골이다. 조선 초기에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생활 동선을 따라 자생적으로 생겨난 그 골목길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역사와 운명을 함께했던 골목길이 마지막 숨을 가누며 재개발이라는 아픔으로 역사에 묻히게 된 것이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오던 그 골목길. 배고픈 서민들이 한 가락의 노래와 끼니를 때우던 골목길. 대학생들이 민주를 걸러내며 막걸리를 마시고 때로는 삶의 철학을 빈대떡에 부쳐대던 그 골목길. 몇몇 남은.. 2023. 3. 3.
첫 수필집 - 파고만댕이의 여름 '파고만댕이의 여름' 출간 검정 고무신을 하얀 운동화로 바꿔 신고, 세상을 만만하게 보며 건방을 떨었던 소년은 자장면 맛을 알면서부터 된장냄새를 촌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얄궂은 운명처럼 세상에 얽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는 법을 배우며 이기심에 물들어 갔다. 세월이 흘러서 나는 .. 2011. 6. 11.
처첩지간妻妾之間 처첩지간妻妾之間 처는 서방을 위해서라면 맨발이라도 웃으며 걷지만, 첩은 구두를 신고도 색깔이 안 어울린다고 새침 거린다. 서방은 처의 군살박인 맨발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첩이 신은 구두의 먼지를 옷소매로 닦으면서 히죽거리는 모습에서 분별을 찾을 수 없다. “박 사장!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나쁜 사람이야.” “신 여사! 내가 뭘 어쨌다고.” 박 사장과 신 여사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야무진 행복을 찾겠노라고 주례 앞에서 엄숙하게 언약했다. 아옹다옹 다투기도 하고 때때로 삐쳐서 단교하기를 반복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을 키워 왔다. 살기 위해서 결혼해야 하는지, 사랑하니까 결혼하는지, 외로우니까 사랑하는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2010. 9. 24.
법은 진실을 가려낼까 법은 진실을 가려낼까 인간의 삶에는 시비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시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법을 만들었으며, 법 또한 인간이 집행하기에 실수가 생기고,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 는 사례도 가끔 발생한다. 그 반면에 법의 맹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어서 우리는 가끔 법이라는 제도에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법원에 갈 일이 없을 줄 알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삶의 연륜이 쌓이고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진실을 가려내기보다는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하 여 법원을 찾을 일이 있었다. 첫 번째,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랑 놀다가 같은 학교 상급생한테 금전요구를 받았다. 막내는 돈을 뺏기기 싫어서 도망치려고 버 둥대다가 신발주머니로 상급자의 안경을 스쳤는데, 그는 주저 없이 막내의 멱살을.. 2010. 6. 12.
골목길 단상 골목길 단상短想 남해바다 통영에서 갓 올라온 싱싱하고 속이 꽉 찬 홍합을 사라고 골목이 떠나가라 외쳐댄다. 거친 경상도 목소리로 아침을 팔고 있다. 허름한 상가건물을 헐어내고 새로이 건물을 짓느라 콘크리트 붓는 소리, 못질소리, 장비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로 골목이 가득 찬다. 그 틈을 헤집고 피자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쌩하고 지나가며 골목을 후빈다. 유년시절 시골 골목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 치는 재잘거림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다. 아릿한 향수에 실려 있던 유년의 골목길은 아름다움을 잉태한 정겨운 꿈이 있었다. 도시의 주택가 골목에는 정겨움 보다는 아픔이 많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무지개꿈 따라 떠난 지 오래다. 순간의 이익에 일희일비하는 소리들로만 가득 차 있다. 생명을 원하고 구하는.. 2009. 12. 2.
창窓의 미학 창窓의 미학 창窓의 미학 창은 사람의 눈과 같아서 내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놓을 수 있는 통로이면서 세상을 내 마음자리로 들여 올 수 있는 통로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창에는 거짓을 담을 수 없으며, 창은 창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치다. 현대에서의 창이란 투시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투시가 되지 않아도 창의 기능에 모자람이 없었다. 유리를 만들지 못하던 때에 봉창을 내어 대나무로 뼈대를 대고 그 위에 한지를 발라 창을 만들었다. 그때의 창은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마음으로도 충분히 세상과 통할 수 있었으리라. 밖이 보이지 않아도 봉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의 온기로 세상인심을 읽을 수 있었고, 가끔 찬 기운이 스치면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바깥.. 2009. 9. 22.
지구를 돌려라 지구를 돌려라 지구를 돌려라 어디로 가야 하나. 왜 가야 하나. 무작정 걸어야 한다. 행로의 경중이나 목적을 따진다면 우리는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인생은 궤도처럼 정해진 행로가 있는 게 아니다. 낮에는 햇빛 따라 걷고 밤에는 달빛 따라 걷는다. 별을 따기 위함도 아니고 사랑을 찾.. 2009. 8. 18.
금강의 끝자락에서 백두에서 흰 말을 타고 거침없이 달려 금강에 이르러 옥빛 담소에 발을 담그면 삶을 깨우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 더 이상의 욕심 은 허물이다. 금강의 품에 안기면 시간이나 공간은 의미 없는 치장이다. 그냥 그대로 시간을 베고 공간에 누우면 자신이 누구이며 무 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에서 말을 타고 달린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평생을 머물러도 모자람이 없을 금강에서 말을 타고 스치듯이 지나친다는 것은 삶 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깍두기다. 그러니 금강에 이르면 말을 돌려보내고 혼자서 유유자적하게 걸으면 된다. 세월이 가든 공간이 바뀌든 마음 두지 말고 절경에 풍덩 빠지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빨리 가서 뭐하게. 민족의 아픔으로 잠시 휴전선이라는 허리띠를 매고 있는 금강.. 2009. 7. 14.
먼저 도착한 택시 먼저 도착한 택시 새침한 한기가 봄의 아침을 풋풋하게 느끼게 한다. 온기가 퍼지기 전에 출발하기로 예약된 기차가 마음을 바쁘게 하는 터라 곤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나에게 새벽은 저승과 이승과의 경계를 가늠하듯 가끔은 내 삶의 이정표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나아감과 물러섬, 교만함과 겸손함, 두려움과 용기, 병약함과 건강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흐느적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견스러워하기도 한다.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대로에 나왔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서울역까지 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촉박하다. 그 사이 햇살이 퍼져 전철이 미끄러지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어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른 새벽이라 택시가 많지 않다. 간간히 급하게 질주하는 택시들.. 2009. 4. 29.
붉은 귀 거북의 애환 곤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을 깨우며 먹이 달라고 앙탈을 부려댄다. 내가 어항주변에 어슬렁거리 기라도 하면 이 녀석들은 비 -보이들이 공연하는 듯 야단법석이다. 뚝배기 뚜껑 같은 무거운 몸을 가뿐하게 뒤집으며 녀석들이 안달하며 몸부림치는 통에 어항바닥에 깔린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이른 새벽 여명을 헤치며 시간을 다투는 파발마를 연상케 한다. 이 녀석은 붉은귀거북으로서 미국이 고향이란다.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와서 몸도 가누기 힘든 작은 어항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을까. 그는 우리 가족들과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감을 한다. 아마 우리 가족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고 있을게다. 시장 따라 가자는 엄마의 손을 따돌리고 게임에 열중하고는 공부만 했던 척 하는 막내의 비밀, 간혹 곤한 낮잠에 침.. 2008.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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