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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피맛避馬골

by 桃溪도계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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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避馬골

 

경복궁과 종로 사이 조선시대 대감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그 길에, 백성들은 대감들의 잦은 행차 때마다 고개를 숙이느라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나라님께서 백성들이 말을 피해서 뒷골목으로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말을 피해서 다녔던 그 길이 피맛골이다. 조선 초기에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생활 동선을 따라 자생적으로 생겨난 그 골목길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역사와 운명을 함께했던 골목길이 마지막 숨을 가누며 재개발이라는 아픔으로 역사에 묻히게 된 것이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오던 그 골목길. 배고픈 서민들이 한 가락의 노래와 끼니를 때우던 골목길. 대학생들이 민주를 걸러내며 막걸리를 마시고 때로는 삶의 철학을 빈대떡에 부쳐대던 그 골목길.

 

몇몇 남은 가게에서 생선을 굽는 비린내를 아무리 피워내도 골목이 다 차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난 흔적 옆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피맛골이라는 간판을 달고. 그곳에서 옛 향수를 들춰보라 하는데 영 내키지가 않는다. 옛 추억이 그리워 발길을 돌려보기는 하지만 발가락 끝이 자꾸 오그라든다.

 

개발이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몇 백 년 동안 불편함 없이 잘 지켜온 골목이 거추장스러워졌을까. 현대의 생활 조건에 맞게 설계를 하고 개발을 하겠다고 역사와 문화를 허물어 내는 일이 마음에 가시처럼 걸린다. 새롭게 만드는 문화도 좋겠지만 그동안 지켜온 소중한 문화를 지키는 일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롭고 현대적인 것만이 생활을 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개발을 함으로써 몸을 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몸 편하자고 마음 뉘일 곳을 없애려 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불편하면 몸도 따라 불편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단세포적인 바보는 아닐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수북이 쌓인 막걸리 병이 역사를 촘촘히 새겨왔던 무용담을 빈병에 가득 채운 채 흔적을 남긴다. 이제는 골목을 지키던 주인도 떠나고 골목을 찾던 객들도 더 이상 찾을 곳이 없다. 켜켜이 쌓인 역사와 향수를 담았던 골목길에서 우리는 멍하니 골목 사이로 난 하늘을 올려다본다. 주변의 빌딩들이 하늘을 덮는다. 그만큼 내 마음도 덮인다.

 

쓸쓸한 골목길에서 내 발거음도 힘을 잃는다. 골목 안에는 이제 몇몇 집에서 마지막 역사를 태우고 있다. 저 집들도 곧 떠날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향수만 남긴 채 우리는 역사를 접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옛일을 아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쉽게 옛날을 잊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역사에 적응해 나간다. 

 

아무 일 없었던 듯 피맛골은 향기를 감추고 우리는 가슴에서 향수를 우려낸다. 다시는 보지 못할 피맛골이여, 내 마음이 고달플 때나 어질지 못한 세상을 피해 숨고 싶을 때, 그때 다시 그 골목길을 열어줄 수는 없을까.

 

또 다른 역사에 묻혀가는 골목길을 이대로 의식없이 허물기보다는 깔끔하게 주변정리를 하고 보존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좀처럼 그들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지우지 않는 외국의 사례를 떠올려본다. 역사의 흔적은 한 번 무너뜨리면 다시 세울 수 없는 문화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관리하고 잘 보존하는 그들의 지혜가 부럽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견이 모자라거나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모자라서 마구잡이로 역사를 허물어대는 우매한 짓을 일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를 지켜야 할 그 자리가 지금 당장 개발이라는 돈으로 환산한 가치에 모자라기 때문에 애환과 향수가 깃든 역사를 묻고 아름다운 미래를 앞당겨서 소모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가진 자원이래야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인적 자원과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가 전부다.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허물어 미래를 가불 하면서 멋쩍게 웃어보지만, 그 웃음 속에는 행복이 끼어 들 자리가 비좁다.

 

- 파고만댕이의 여름 P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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