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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여보세요? 여보시오!

by 桃溪도계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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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누군교?"
"여기는 00 고객센터인데요. 00님께서 전화요금이 육십이만구천 원 나왔습니다.
"머라카노, 무슨 전화를 썼다는 말인교."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고객님의 전화가 문제가 생겼나 봐요. 경찰에 접수해 드릴까요.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니까요, 정확하게 파악해서 5분 후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라마 그라이소?"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는 얼떨결에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전화비라고 해봐야 고작 몇 만 원인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분이 1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가 왔다. 
 
"파악해 보니까 사기꾼이 전화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얼른 은행감독원에 신고해야 합니다. 통장이나 카드 분실한 적 없습니까?"
"그런 거는 없는데요."
"주민등록번호 말씀해 주세요."
"예, 주민등록번호는 000000-0000000입니다."
"은행감독원이 뭐 하는 곳인 줄 아시죠."
"자꾸 머라캐쌌노. 나는 그런 거 모림니더."
"은행 감독원은 통장 뒤에 있는 까만 테이프 있잖아요. 그 속에 들어있는 비밀을 다 알고 있는 곳이에요. 제가 신고하면 좀 있다 은행감독원에서 전화가 갈 겁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서 이렇게 소상하게 전화까지 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가슴이 쿵쾅거려서 전화받는 손이 다 떨린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은행감독원입니다. 고객님의 전화요금 문제로 신고가 들어와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문제가 생겼네요.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니까 협조 부탁드립니다. 주민등록증이나 카드 분실한 적 없나요?" 
"아까 그런 일 없다 캤는데요."
"피해 없도록 해 드릴 테니 묻는 말에 정확하게 답변해 주세요. 통장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나요?"
"아레께 복숭 팔아서 이삼백 들어 있심더."
"마이너스 대출되는 통장인가요?"
"된다 카던데요...."
"한도는 요?"
"천만 원이지 싶다."
"아, 그러세요. 저희들이 그동안 경험한 바로는 대다수 범인들이 주변 사람이나 은행 직원 중에 많으므로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이야기하면 비밀이 새나가서 범인을 잡기가 힘들어져요. 농협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려요?"
"한 10분 정도 걸릴낍니더."
"그럼 통장과 핸드폰 들고 농협으로 얼른 가세요. 빨리 막아야 하니까요. 10분 후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라이소."
 
어머니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손발에 두서가 없다. 평소에 통장을 넣고 다니는 가방을 뒤졌는데 통장이 없다. 큰일 났다. 이거 문제가 커졌구나. 조바심이 생겨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맨날 갖고 다니는 통장이 왜 갑자기 없어졌을까. 전화요금과 통장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통장이 없어서 덜컥 겁이 났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농협에 도착하셨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통장을 몬 찾겠어요."
"그럼 전화 끊고 차분하게 다시 찾아보세요.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통장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런 낭패가 있나. 하필 이럴 때 통장이 없을까.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어머니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다시 전화가 왔다.
 
"통장 찾으셨나요?"
"없씸더."
"그럼요. 얼른 농협에 가셔서 통장분실 신고 하세요. 농협 직원한테 다른 말하지 말고 그냥 분실신고만 하시면 제가 전화드리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촌에 사는 나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구나. 이 사람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새 통장을 발급받았다. 혹시나 해서 우체국에 들러 오래된 다른 통장도 분실신고를 하고 새 통장으로 발급받았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다른 피해는 없을까 궁금하여 내친김에 00 통신 00 지점에 들러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
 
"아지매. 사기 전홥미더."
"아지매! 오늘 큰일 날 뻔했네."
 
어머니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괘씸할 수가 있나.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시골 사람들한테 이런 사기를 치다니..., 사기 친다는 얘기만 들었지 정작 본인이 이렇게 사기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비틀거리는 차를 몰고 집에 도착하니 곧바로 전화가 왔다.
 
"은행감독원입니다."
"여보시오!"
"은행감독원 좋아하고 있네. 도대체 당신들 머 하는 사람들잉교?"
"어디 해먹을 짓이 없어서 시골 사람들한테 사기를 치고 지랄이여!"
 
어머니는 화가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히는 틈으로 간신히 몇 마디를 꺼내어 사기꾼들에게 던졌다. 그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루 종일 일도 못 하고 벌벌 떨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입맛도 없고 맥이 탁 풀린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을까. 그래도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다.
 
이튿날, 절에 갈 일이 있어서 바랑을 챙기는데, 어제 그렇게 찾아도 없던 통장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 늘 갖고 다니던 가방에 들어 있었으면 꼼짝 못 하고 당했을 일을 생각하니 숨이 탁 막힌다.
 
주변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려고 겪었던 얘기를 전해 주었더니 벌써 수백 만원씩 사기당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다. 그들은 창피사고 속상해서 얘기를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아이들을 이용한 보이스피싱이 성행하여 부모들이 혼쭐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별의별 방법을 동원하여 금전을 뜯어내고 사기를 친다. 대부분 외국에서 국제전화로 자행하는 일이라 하니 더 끔찍스럽다. 국가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도둑들은 마음껏 국경을 넘나들며 못쓸 짓을 자행한다.
 
무기가 발달하고 세상에 대한 경계를 더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어도 인간의 약탈 본능을 막지는 못하나 보다. 아프리카 해협에서 작은 배로 무역선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해적이나, 농사짓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양심에 가책 없이 돈을 뺏어가는 보이스피싱이나, 자국 내에서 권력을 이용한 갖가지 청탁으로 얼굴에 먹칠하는 사람들의 도둑 근성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을까.
 
"여보세요? 아니, 여보시오!
 
- 파고만댕이의 여름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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