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언 놈이여!

by 桃溪도계 2023. 4. 11.
반응형

 
사월 초순의 한재 미나리 골은 아직 봄기운을 다 펴지 못해 냉기가 골짜기마다 남아있다. 아침 해가 병풍을 열고 말갛게 고개를 내밀어 골짜기를 비추면서 고모부님의 칠순 잔치가 시끌벅적해지며 흥이 돋는다.
 
아무래도 잔치는 고모부님 친구 분들이 주축이다. 식사를 하고 술잔을 돌리면서 바쁜 안부를 챙긴다. 술잔이 늘어갈수록 건들건들 허리춤이 느슨해지고 혀가 길어지면서 취기가 돈다. 처음 해보는 칠순 잔치라 앞뒤 순서가 분명하지 않고 다소 뒤숭숭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흥겨운 자리에 작은 흠이 있으면 무슨 대수일까. 형식이 많아 따분하고 지루하던 행사가 대충 끝나고 뒤풀이에 들면서 놀자판이 되었다. 아들아 딸아, 며느리야 사위야. 놀아라, 부어라, 마셔라, 불러라, 업어라...,
 
그런데 마음만 들뜰 뿐, 톱니바퀴 어긋나듯 왠지 모르게 흥이 깊어지지 않는다. 같은 또래이신 친구 분들이 좋아하는 리듬과 친척 분들이 부르는 노래의 리듬이 맞지 않아서다.
 
친구 분들은 의례히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느릿느릿한 블루스 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분위기도 싫어한다. 물론 끝까지 다 아는 노래도 잘 없을뿐더러 취기에 음정 박자 잘 맞추기 힘드니까, 노래방 기계가 연주하는 리듬을 따라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디스코풍의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어놓고 무조건 흔들어 대는 걸 좋아하신다. 음적 박자 신경 쓰지 않고 리듬에 몸을 맡기고 흥을 발산한다. 친구분들은 잔칫집의 흥을 제대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진행을 맡아주셨던 사람은 자칭 국악인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장구채를 멋지게 휘날리며 '에헤라 듸여 ~~~' 흥을 돋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국악인은 국악보다도 트로트를 더 잘한다. 엇박자에서 쉽게 흥을 돋우지 못하던 잔칫집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놓는 재주를 가졌다.
 
한창 흥이 익어갈 무렵 국악인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오십 중반쯤의 정장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국악인은 온통 그 남자의 눈치를 보며 신경을 쓴다.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싱싱한 과일들을 통째로 들이댄다.
 
잔칫집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친구 분들이 연신 몸을 흐너적거리며 고모부님의 칠순잔치에 자신의 흥을 마음껏 뱉어낸다. 어르신들은 흥겨운 자신의 기분을 국악인에게 전달한다. 만 원짜리 팁이었다. 장구를 들고 있는 국악인에게 팁을 전달하는 방법은 한복 가슴 섶에 찔러주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르신들은 만 원짜리 팁을 가슴 섶에 찔러주면서 너무나 행복하다. 너도나도 팁을 찔러준다. 국악인은 핏대를 세우며 흥에 열중이다.
 
그때 객석에서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그 남자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취기를 빌어서 "언 놈이여!"
"남의 여자 가슴에 손 집어넣는 놈이 대체 언 놈이여!"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을 상대로 쌍욕을 해대며 손모가지를 분질러 놓겠다느니 하면서 분위기를 망친다.
"언 놈이여! 당장 기 나와라, 내가 ×을 잘라 버릴 테니까."
 
친구 잔치에 와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르신들은 술이 다 깨서 자리를 뜨기 바쁘고, 그 남자는 남의 잔칫집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장 난 축음기판처럼 "언 놈이여! 빨리 나와"를 계속 외쳐댄다.
 
누구를 위한 칠순 잔치였는지. 칠십 년 동안 열심히 살아오신 고모부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준비했던 잔치가 흥을 돋우라고 모셔왔던 그들 때문에 오히려 와그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파고만댕이의 여름 P 102 -

728x90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비와 애벌레  (21) 2023.05.26
십년지기  (12) 2023.05.18
추전역 가는 길  (27) 2023.03.22
여보세요? 여보시오!  (37) 2023.03.07
피맛避馬골  (44) 2023.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