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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추전역 가는 길

by 桃溪도계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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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서면 나는 버릇처럼 그리움을 좇는 방랑자가 된다. 오늘도 나는 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누가 그 길을 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도 길을 찾아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한 때는 행복을 좇아 길을 떠나고, 또 한 때는 슬픔에 쫓겨 길을 떠났을 것이다.

 

가족들 모두가 선잠을 깨어 거리로 나왔다. 택시기사가 길을 막는다. 청량리역까지는 너무 멀어서 안 가겠단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한산한 길을 멀어서 안 가겠다니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아마 다섯 식구가 부담스러웠나 보다.

 

추전역 가는 길이 첫걸음부터 삐거덕거린다. 다른 택시를 탔다. "이렇게 길이 뻥뻥 뚫렸는데 멀수록 더 좋지요"라며 잠시 당황했을 우리를 달랜다. 길 위에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이렇게 길을 찾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다. 길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이 있으며 그 길에 이르는 길도 천차만별이다.

 

청량리역은 언제나 그러하듯 부산하다.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같은 길 위에 선 것이다. 하지만 기차 안에 탄 사람들이 찾는 길은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같은 피를 나눈 가족들도 길의 크기나 색깔, 그 모양이 다르다. 

 

열차 안은 꼭 작은 우주를 내려놓은 듯하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차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것을 보니 또래들과 경쟁하면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가 보다. 또 몇몇 중년의 아줌마들은 음악을 틀어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춤을 춘다.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눈을 떼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키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내 가슴보다 더 넓으며 길은 내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다. 그들의 길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랴.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꼬집을 수는 없다. 기차는 사람들이 각자 품고 있는 길을 제멋대로 흔들어대며 눈길을 씩씩거리며 달린다.

 

한때 온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며 문전성시를 이뤘던 태백선 주변의 풍경들은 식은 연탄재처럼 온기를 잃었다. 마치 엄마 손을 놓쳐 길을 잃어버린 코흘리개 아이같이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엄동설한에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객쩍은 노파심에 둔탁하게 내뱉는 기차 소리를 원망해 본다.

 

눈이 내린 철길은 길의 경계를 잠시 지우고 하얗게 덮여있다. 하얀 캔버스를 가위로 자르듯 매끄럽게 달려 기차는 해발 855미터에 위치한 추전역에 다다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이다. 손바닥만 한 터에 웅크리고 있는 역사驛舍는 제 얼굴보다 더 큰 이름표를 달고 승객들을 반긴다. 겸연쩍은 미소가 수줍다.

 

추전역에는 오징어를 구워서 파는 순박한 아저씨가 더디게 익는 오징어를 꿋꿋하게 익혀가며 인심을 판다. 갓 쪄서 콩고물을 묻혀낸 취떡을 파는 할머니는 한쪽 팔을 잃었지만 한꺼번에 몰아닥친 사람들의 눈빛을 읽는 데는 오히려 덤이 남는다. 곶감을 파는 아저씨와 강냉이 뻥튀기를 파는 아줌마는 한숨 사이로 깨알 같은 질투를 뱉어낸다.

 

역사 앞마당에 석탄을 나르던 광차鑛車가 궤도 위에 앉아서 졸고 있다. 그 옛날의 영화는 잊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들을 맞는다. 그에게도 꿈은 있었겠지. 이제 아무렇게나 구겨진 꿈을 기억하기도 지쳤을까. 원망하듯 늘어진 모습이 가슴을 짠하게 한다.

 

처음에 이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찾았을까. 한때 그들도 그들이 찾은 길 위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기도 했으리라. 또 한때 사라진 영화를 회상하며 슬픔에 젖기도 했으리라.

 

희끗희끗 눈발이 뿌려대는 추전역을 뒤로하고 기차는 밀려나간다. 행여 꿈 자락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추전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보물지도를 가슴에 품고 숨 가쁘게 달려왔건만, 정작 내가 찾아야 할 보물은 없었다. 누가 훔쳐간 것일까. 아니면 지도를 잘못 가져왔을까.

 

온갖 영욕이 함께 했을 추전역을 다시금 떠올려보며, 내가 찾고자 했던 길은 이 길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의 길은 오직 내 마음속에 있으며, 그 길을 찾아가는 길도 내 가슴에 있음을.

 

- 파고만댕이의 여름 P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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