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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십년지기

by 桃溪도계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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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고 아쉬움 없이 살아온 세월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의 호기심과 설렘이 있었지만, 철없는 아이들처럼 호들갑 떨면서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만히 가슴에 곱게 담아 지어내는 실웃음 하나에도 하늘이 넌지시 웃어주곤 했기에, 당신을 생각하며 나만의 사랑을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삶이 깊어지고 시간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가면서 짜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니며 힘들거나 더러워도 불평 없이 내 그림자를 지켜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세월의 탑이 쌓아지는 만큼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그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학교나 학원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PC방이나 농구코트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더울 때나 추울 때를 가리지 않고 당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당신 품이 모자라 제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흐뭇한 미소를 아이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당신 주변에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고, 관심을 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어둠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자칫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나는 새 친구를 얻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행복했습니다. 적당한 설렘과 말하지 못할 기쁨이었습니다. 가끔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당신과 눈길이 마주칠 때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새 친구에게 정을 쏟느라 애써 눈빛을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신인들 왜 질투가 없었겠습니까. 지나친 호들갑에 고까운 생각이 들었겠지만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새롭게 맞은 친구는 뭣 때문에 심사가 틀어졌는지 뽀조록하여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려고 보름 전에 호흡을 맞춰가며 몇 번 손잡고 연습을 해보았지만, 도무지 새침한 마음을 거두지 않습니다. 나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도저히 같이 뛸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다급한 마음에 새 친구의 친정에 들러 두 번째 친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는 날렵하지는 않지만 푸근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 같이 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 새 친구와 조우하다가 든 멍 때문에 두 번째 친구도 불편해서 좀처럼 품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고심 끝에 까맣게 잊고 지내던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도 잊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깃이 해져서 도저히 풀코스를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용기만 내어 준다면 제가 곱게 보듬어 안고서라도 끝까지 같이 달릴 생각이었습니다.
 
사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렇게 당신이 곁에 있어 한결 마음 든든합니다. 가다가 쓰러지면 어떻습니까. 당신과 함께 한 시간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다소 무거워서 힘겹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끝까지 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해진 뒤꿈치가 벗겨지지 않도록 버텨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처럼 잘 달릴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게는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정이 있고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을 십 년이나 묵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궤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당신이었는데 오늘 밤에는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된 영문입니까. 나는 당신만을 믿고 그 멀고 힘든 거리를 함께하기로 다짐했는데 당신은 어디 숨었습니까.
 
당신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아뿔싸!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당신은 이미 내 곁을 떠났습니다. 이대로 영원한 이별입니까. 참 쓸쓸하고 어처구니없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낮에 아내가 집안정리를 하는 동안 당신은 밖으로로 난 발자국에 서글픔을 가득 채웠습니다. 설움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그 발자국을 다시 안으로 돌리기가 힘들었겠지요. 당신에게서 받은 사랑을 채 돌려줄 겨를도 없이 당신은 버려졌습니다.
 
그 밤에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친구들을 몽땅 불러내었습니다. 아이들의 친구까지도 모두 다 짚어 보았습니다. 멍울만 없었어도 웬만큼 맞출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새 친구는 친정에 가서 빚 독촉하듯 드러누웠고, 나는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일러 주었습니다. 당신의 조언대로 두 번째 친구와 조금씩 양보하여 다시 호흡을 맞춰보았습니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용케 잘 맞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출발선에 섰습니다. 내 인생에서 또 다른 연극의 장막을 엽니다. 이른 아침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번쩍 들고 기찬 함성으로 힘차게 내딛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지만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매 순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만난 십여 년의 인연을 나는 소중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어느 때, 내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거나, 아니면 내 삶의 소중한 매듭에 설 때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곱게 안아주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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