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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붉은 귀 거북의 애환

by 桃溪도계 2008.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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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을 깨우며 먹이 달라고 앙탈을 부려댄다. 내가 어항주변어슬렁거리

기라도 하면 이 녀석들은 비 -보이들이 공연하는 듯 야단법석이다. 뚝배기 뚜껑 같은 무거운 몸

가뿐하게 뒤집으며 녀석들이 안달하며 몸부림치는 통에 어항바닥에 깔린 자갈 부딪치는

이른 새벽 여명을 헤치며 시간을 다투는 파발마를 연상케 한다.

  

   이 녀석은 붉은귀거북으로서 미국이 고향이란다.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와서 몸도 가누기 힘든

어항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을까. 그는 우리 가족들과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고 교감을 한다. 아마 우리 가족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고 있을게다.

  

   시장 따라 가자는 엄마의 손을 따돌리고 게임에 열중하고는 공부만 했던 척 하는 막내의 비밀, 간혹

곤한 낮잠에 침을 흘렸을 아내의 어설픈 모습, 딸아이가 밤늦게까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비밀 지

령 같이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큰 아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몇 번이고 머리를 고쳐 빗고 옷매무새

를 고치고는 태연한척하며 으스대는 모습, 부부간의 애정을 과시하는 좀은 야릇한 모습도 그는 죄다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가 태어나기 두어 달 전에 시장에서 꼭 엄지손톱만한 청거북 두 마리를 사와

서 길렀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족이랑 진배없이 서로 간에 애정과 교감이 충분히 쌓여

서 이제는 가끔 헤어져 있는 시간이면 은근히 한 부분 그를 걱정하기도 한다. 

  

   키우면서 우여곡절이야 왜 없을까 만은 그래도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로는 가장 편한 동물이다. 며

칠씩 집을 비워도 걱정이 없다. 심지어 한 달 이상 먹이를 주지 않아도 그는 끄떡없다. 어떤 때에는 어

항을 뛰쳐나와 농 밑에 숨어서 달포이상 나오지 않아서 죽은 줄 알고 어항까지 비웠는데 나타난 적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무심하게 살아오던 중 몇 년 전에 암컷 한 마리가 죽었다. 이 녀석은 우리 집에 시집

올 때부터 골골거리며 잘 먹지도 않고 입을 뾰족하게 내 밀고는 삐쳐있었다. 시집이 영 마음에 안 들었

지 서방이 션찮아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먹지 않으니 잘 크지도 않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찌나 안쓰럽고 측은한지 이 녀석들을 들 여 온 걸 후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 꼼짝달싹 하지 않고 옹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어항에서 건져냈다. 아무리 얼레고 달

래도 미동이 없다. 그는 서방보다 반만큼도 못 자랐다. 한 십년간 서로가 알게 모르게 정을 쌓아 왔는

데 죽어버렸으니 가슴이 짠하다. 그를 주말농장 귀퉁이에 묻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에 배고픔을 이기려고 타국에 건너 간 이민자들을 생각했다. 거기서 곤한 삶을 이어가다

가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향에 오고 싶었을까. 자신은 이국 만리타향에

서 삶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식들에게 어떤 꿈을 전해주고 싶었을까. 너의 고향은 한국이니 그리 알거

라.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되느니라. 이런 천박한 유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리라.

  

   지금은 나머지 한 마리만 남아서 우리 식구들과 서로 신뢰와 배려로 정을 쌓아간다. 먹이를 한 움큼

씩 줘도 금방 다 먹어 치우는 식성으로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 이놈들을 종교적인 행사의 일

환으로 강에다가 방생한 적이 있었는데, 토종 물고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어 환경을 교란하는 동물

로 분류되어 지금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이 녀석들 키우다가 귀찮다고 강에다 도로 살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십년 넘게 같이 살다보니 서로가 무감각해서 각별하고 애틋한 정은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려니 하

고 방관하듯이 키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우리 가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때때로 먹이 챙겨주고,

어항을 씻어주면서 그를 살피고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서로의 우주를 지키려고 분주하게 살다

가도 하루에 한 두 번씩 교감을 갖기 위해 눈을 맞춘다.

  

   언젠가는 이 녀석도 죽을 것이다. 그와 내가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누가

먼저 죽든 간에 섭섭함을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동물들처럼 진한 애정으로 키우

지 않아서 안달복달 섭섭하지는 않겠지만, 책갈피에 끼워둔 빛바랜 낙엽처럼 애잔하게 스며드는 섭섭

함이 오래도록 무채색의 슬픔으로 가슴에 남을 거 같다.

  

   유독 막내가 그의 먹이를 잘 챙긴다. 마무래도 서로에게는 남다른 애정이 있나보다. 막내 냄새가 진

하게 배어나는 그에게 좀 더 진한 애정을 주어야겠다. 서로가 인연의 끈을 놓아야 하는 때에는 좁쌀 같

은 슬픔이라도 남길 수 있어야 내 가슴이 따뜻할 거 같다. (2008. 강남문학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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