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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여백이 있는 아침

by 桃溪도계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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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등산길을 오르면서 아침을 깨우는 내 자신을 대견스러워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여명을 헤치고 도시의 아침을 깨운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않은 자부심이었다. 새벽까지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부어대던 날 아침에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면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벌떡 일어나곤했다. 숙명같은 아침을 깨우려 함이었다.

 

 

올이 풀린 소매자락에서 풀려나오는 실을 온 몸에 칭칭 감아대며 한 줄의 시를  부여잡고 밤새도록 불을 밝히던 날 새벽에는 지친 아침을 재우기도 했다.

 

 (2008년 3월 16일...청계산)

 

나의 아침은 내가 깨워야만 일어나는 연약한 이불이었다. 그런 아침을 나는 사랑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내내 나는 아침을 깨우지 않았다. 내가 게으른 탓이겠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맨날 내가 깨워야만 일어나는 아침에게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놓으려고 깨우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그것은 오만불손한 착각이었다. 내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단 일초의 허트러짐도 없이 곳곳하다.

 

 

 

아침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철부지 애교라서 봐 줄만 하지만, 그 아침을 내가 깨워야만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니 이 깜찍한 교만을 어떻게 변명하랴.

 

아침은 내가 깨워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아침이 나를 깨운다. 이 아침에 나는 깨어나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 수만번 겹겹으로 싸인 번뇌를 어떻게 걷어내어 참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히 찾을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닿으면 섬뜩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왜 태어났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죽는다면 끔찍스러운 상상이다.

 

 

 

오늘도 아침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세월은 저 혼자만 잘났다고 덜렁대며 쫄랑쫄랑 앞서간다. 스치듯한 귀뜸이라도 좋다. 딱 한 번만 나를 깨우치고 싶다. 세월은 아침이 왜 나를 깨우는지 알고 있을텐데, 나는 아침에 왜 일어나는지 모르니 서럽다.

  

밥을 먹기위해서 일어나는 아침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를 깨우기위해 산에 오르면서 아침을 곱씹어본다. 무미하다. 아침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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