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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건전지 인생

by 桃溪도계 2007.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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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지 인생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건전지 없는 삶은 단팥 빠진 찐빵이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건전지의 독성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마약 보다 더 강한 중독성 흡입력을 갖고 있어서 권력과 돈으로도 건전지의 마취에서 깨어나기란 쉽지 않다.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지리산 산행을 한 적이 있다. 카메라가 없어도 산행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고가의 장비를 들고 산행을 하면 카메라를 다칠 수도 있고, 때로는 사진을 촬영한다는 이유로 힘든 산행을 더 힘들게 이어가야한다.

  

   산행일정을 중간쯤 소화했을까. 건전지가 없으니 교환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산행을 떠나기 전에 충분한 휴식과 식사를 제공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탓이다. 요즘 카메라는 예전과 달리 아무고기나 닥치는 대로 먹는 게 아니라 먹어 본 고기만 먹는다.

  

   카메라가 배고프다고 난리다. 첨에 몇 번은 겁만 주더니 차츰 말을 듣지 않는다. 나중엔 아예 입을 닫아 버린다. 심통이 많이 난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려야 사탕이라도 주면서 달랠 볼 텐데, 숫제 기회를 주지 않는다. 괜히 미안해진다.

  

   산행 내내 안절부절 하다.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속 편할 텐데,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계속 들여다보며 꺼내보고, 다시 켜보기를 반복해도 조개같이 꽉 다문 입술을 열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그때, 좋은 풍경들이 병풍처럼 스쳐간다. 화면을 정지시킬수가 없어서 아쉬움은 더 커진다. 한참 만에 겨우 작은 입을 달싹해 보더니 다시 다물어버린다. 원망이 쌓일수록 불안은 커져간다.

  

   마약환자의 고통이 이럴까. 단 한 번의 셔터를 누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면, 근사한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잘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안 열리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메라를 달래보지만 삐친 카메라는 마음을 돌릴 줄 모른다. 야속한 마음을 드러내 놓고 화풀이 할 수도 없다. 안절부절 한 마음에 손이 떨리고 침이 마른다.

  

   그뿐이랴. 하산이 끝날 무렵 날머리에서 집결지를 알아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 한 통화를 채 끝내기도전에, 산행하느라 지친 몸을 원기회복 하느라 건전지를 다 먹어서 배고프다고 신호음을 낸다. 연신 불안에 휩싸인다. 동료들을 만나기까지는 계속 연락을 취해야한다. 처음부터 핸드폰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집결지를 단단히 정해두었을 터인데, 핸드폰을 철석같이 믿었던 만큼 건전지에게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여하튼 건전지 없는 전화기는 장난감 전화기랑 똑 같다. 건전지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에만 길들여지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건전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건전지는 우리에게서 따뜻한 사랑과 끈끈한 우정을 눈 하나 꿈쩍 않고 마구잡이로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사랑과 우정을 뺏어만 가면 누가 뭐라나. 건전지는 우리들의 삶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질투한다. 단 하루도 품에서 건전지를 떼어 놓을 수가 없다. 

  

   건전지란 놈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 질투심이나 중독성은 치료가 불가능한 바이러스로 성장해 갈 것이다. 앞으로는 자동차나, 의복, 때로는 장기의 일부에까지 건전지가 침투하여 그 중독성의 범위를 넓혀 갈 것이다.

  

   건전지가 없으면 불행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쩌면 인간들은 행복한 아름다움을 지우면서 불행한 아름다움을 찾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인간들은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어가면서 행복도 멀고 어려운데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행복으로부터 더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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