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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고구마 도시락

by 桃溪도계 2007.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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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도시락


  바위같이 단단하고 호랑이같이 무서웠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어머니의 둥글둥글한 웃음 속에는 기쁨보다는 삶에 대한 회한이 더 많이 잔주름에 묻히는데도, 운명처럼 기

대려고만 하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내 가슴속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던 어머니의 초상이 빛을 잃고 퇴색해 간

다는 걸 느낄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현대를 살아가는 어머니들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바짝 매달려 있다. 아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이를 한 명만 둔 어머니는 자식을 친구나 애인처

럼 여기며 살아간다. 아이의 활동범위 안에 어머니가 들어가 있다. 아이가 어머니 품을 떠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 품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을 두려

워한다.

  

  자식은 혼자서 걸어갈 수 있는데 어머니는 혼자서 걸어가지 못한다고 우기며 아이의 발꿈치를 놓치지 못한다. 아이가 크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어머니를 불편해하

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서운함을 주체할 수 없어 쉽사리 우울증에 걸린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예의염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때로는 아이를 잘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지

만 자존심이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식을 위해서는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는 어머니를, 자식은 때때로 무식하거나 염치없다고 느껴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한

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학교 가는 게 부끄러워 어머니께 오전수업만 한다고 하고서 학교에 간 적이 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도시락을 꺼낸다. 도시락이 없는 나는 곧바로 텅 빈 운동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수돗가로 갔다.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하늘을 보았다. 강렬한 땡볕에

어린 가슴은 주눅 들었다. 오전수업만 한다는 나의 거짓말을 미심쩍어하시던 어머니의 눈빛이 이마 언저리에 맴맴거린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다 까먹고 운동장으로 뛰어나올 때쯤 나는 축 늘어진 기운을 달래서 교실로 들어갔다. 급장이 책을 펴 놓고 공부하고 있다가 나를 보자 도시락을 꺼낸

다. 뭐냐고 묻는 내게 어머니께서 주고 가셨다며 보자기에 싸인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전해준다. 어머니께서 점심시간에 맞춰 몸빼차림으로 한걸음에 시골길을 달려와 전

해주고 간 도시락에서, 어머니의 심장이 콩닥거리고 보자기를 잡은 내 손이 짜르르 떨렸다.

  

  보자기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도시락 안에는 찐 고구마가 다정하게 서로를 보듬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도시락을 제대로 싸올 수 없

는 형편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숨기고 싶었던 자존심을 채 감추기도 전에 어머니의 정성이 눈물에 그렁거렸다.

  

  친구는 재빠르게 눈치를 훑으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하나 먹으라고 건넸다. 친구는 거추장스러운 듯 껴입고 있던 나의 부끄러움을 털어주려고 덥

석 받아서 먹었다. 나도 한 개 꺼내 먹었다. 배고픔보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울림을 견딜 수 없어서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도저히 넘길 수가 없어서 도시락을 덮고 보자기

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5교시 수업을 하려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니까 책 겉장이 도시락의 온기를 물고 나와서 따뜻하다. 어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정성이 배어져 있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어머니인데 그때는 부끄러움이 더 많았다. 자식들이 반찬투정을 부릴 때마다 어머니의 고구마 도시락을 떠올려본다. 또다시 어머니의 고구마 도

시락을 받을 수 있다면 세상 그 어떤 진미보다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는 퇴행성관절염을 앓고 계시기 때문에 손가락이 성치 않으시다.

  

  “손가락이 왜 이래요!”라며 덤비는 자식들한테 손을 뒤로 감추면서 괜찮다고만 하신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억

척스럽게 일만 하다가 흉하게 무뎌져 가는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부끄러워하신다.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배고픈 자식을 위해 고구마 도시락을 들고 숨 가쁘게 달려 오셨던 그 시골길을 함께 걸으며, 손가락 마디마디에 삐뚤빼뚤하게 맺혀

있을 어머니만의 아름다운 향기를 오래도록 풀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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