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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以金制朴 이김제박

by 桃溪도계 200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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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주병에 거품 빠지듯 김씨와의 인연이 싸늘해질 즈음 박씨가 왔다. 살아갈수록 너덜너덜해지는 조각난 행복을 맞추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김씨는 부모님이 병중에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대뜸 현장소장 직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해왔다. 김씨만 믿고 별다른 준비 없이 꾸려왔는데 그만두겠다니 그럼 어쩌란 말이냐.

  

  많이 달래었지만 허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이겠거니 생각하고 더 이상 그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내 곁을 떠났고 나는 하늘이 때로는 어두운 이유를 가슴에 하나 더 선명하게 새겼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그 공백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힘 드는 시기였다. 그때 조그만 가게를 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신용불량에 걸려 어깨가 축 처진 박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끌고 다닐 정도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던 터라 현장소장 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대뜸 수락했다. 경험이 미천하여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씨가 동종업계로 발길을 돌렸다는 후문이 들릴 때마다 괘심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와의 얇아진 인연의 끈을 탓할 뿐 누구를 탓하랴. 단 한마디도 싫은 소리를 뱉지 않았다. 하루빨리 혼탁한 현실을 빠르게 벗어나서 한여름 뙤약볕에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호박꽃잎처럼 호기만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랐다.

  

  현장을 이어받은 박씨는 물 만난 고기처럼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다소 무리가 따르긴 했어도 ‘순망치한’ 이라 했던가. 처음에는 다소 울퉁불퉁 거렸지만 곧 평탄해졌다. 박씨는 잃어버린 세월을 꿰매려는 듯 열심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두텁게 감싸고 있던 상처는 차츰 얇아져 갔으며 자신감은 한층 견고해졌다.

  

  볕이 들면 그늘이 지는 법. 그렇게 일 년 반이 지났을 즈음 이번에는 박씨가 대뜸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피켓을 높이 들었다. 그는 일 년 반 동안 배도 양껏 채우고 피켓을 들 수 있을 만큼 근육도 많이 키웠다. 눈치껏 억지로 숨겨왔던 심술보가 부풀대로 부풀어서 세상 모든 게 눈 아래로 보이기 시작했던 거야.

  

  자초지종을 들어봤지만 그가 그만두어야 할 명분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를 달랬다. 그는 무조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심술이 가득한 배를 들이민다. 내가 한 발 빼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였다. 한참을 설득해도 꿈쩍도 않던 그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이 두 개였다. 엉큼한 그의 속내가 슬쩍슬쩍 보인다.

  

  앉으니까 눕고 싶었던 거야. 현장 공사부분을 떼 내어서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쉽게 내색하지 않고 갖가지 핑계를 늘어놓으며 우려를 담았다. ‘그럼 할 수 없지’ 하고 슬쩍 당기니까 그는 바짝 달라붙었다. 바로 그거였다. 그는 째지는 욕심이 불쑥 튀어 나올까봐 노심초사 숨기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했다. 현장을 운영해 나가는 테크닉이 쌓여가는 만큼 여유도 생겼다. 때때로 경비를 과다하게 쓰는 게 눈에 거슬렸지만 인내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박씨의 위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이라며 으스대었다. 예의 그 볼록 나온 배를 건들거리며 삼년동안 욕심을 마음껏 채워가고 있었다.

  

  세월 참 빠르게도 흐른다. 박씨가 현장을 맡은 지 오년이 되었다. 처음 이년간은 순하게 일만 하였지만 나머지 삼년은 자신이 공사부분을 떼 내어 소사장제로 운영 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 정도면 만족하는 조건이지만, 욕심으로 가득 찬 박씨의 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박씨는 갑 측의 회사 담당자와 모의를 하여 아예 현장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계획을 하고 각본을 짜고 칼을 들이밀었다.

  

  “공사를 그만해야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진행 중인 일 마치면 보따리 싸서 내려 가 봐야겠습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그럼 어쩌려고”

  “그냥 뭐... 어떻게 되겠지요.”

  

  이틀쯤 후에 갑 측의 담당자가 묘한 소리를 한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번일 마치면 박씨랑 일 해야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현장에서 나가라는 소리다. 평소에 친근하게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비수로 목을 겨눈다. 내가 이 현장에 육년 째 무탈하게 공사를 이어오고 있는데 갑자기 나가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세상이 깜깜해졌다.

  

  박씨는 자신이 없으면 이 현장을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을 했으며, 갑 측의 담당자와의 그동안 쌓아온 친분을 무기로 나를 몰아내기로 쿠데타를 계획하였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비 맞은 거지꼴이 되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박씨가 어떻게 그런 몰염치한 짓을 하려 했을까. 아무리 손가락으로 헤아리려 해도 손가락이 굽혀지지가 않는다.

  

  원 발주사의 담당자를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갑 측의 담당자가 어느 정도 손을 써 놨기 때문에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직원을 잘 관리 하지 못한 내 탓이었다. 직원 잘 관리하지 못한 탓은 내게 있지만, 같은 현장에서 같은 공정의 일을, 그 일을 맡아서 하던 직원이 꿰차고 간다면 말도 안 된다. 상 도덕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명백하게 강도짓이다.

  

  많이 속상하고 분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며칠 지나면서 산죽의 죽순처럼 삐죽삐죽 돋아 올라서 지칠 줄 모르게 성성하던 박씨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여론이 차츰 우리한테로 기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갑 측의 담당자는 굽히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에게는 공사를 맡길 수 없다고 버틴다. 그 이유는 박씨 아니고는 공사를 진행하기 힘들다는 명분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부장이 급파되어 현장을 접수했다. 그래도 그들은 한 발짝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쯤 나는 현장 근방에 얼씬거리기도 싫었다. 인간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한 숨만 길게 꼬고 있었다. 며칠을 고심하다가  오년 전에 현장을 나갔던 김씨를 불렀다.

  

  “자네가 이 현장을 좀 맡아주게.”

  “저야 좋지만,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 멋지게 해 보겠습니다.”

  “그럼 좋아!"

  

  한 때는 김씨가 어지럽힌 중원을 박씨가 수습했지만, 이제는 창을 거꾸로 들고 성문을 부수고 있는 박씨를 물리치려 김씨가 전장으로 나간다. 김씨는 갑옷을 여미며 자신감으로 무장한다. 반드시 승전보를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세상은 내 것도 아니며 네 것도 아니다. 한 때는 전부가 내 것인 줄 알았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가면서 나는 또 김씨가 보내는 승전보의 색깔을 살펴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김씨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격려하는 일이다. 멋진 호박꽃을 투구에 폼 나게 꽂고 보무도 당당하게 귀환 할 일을 그려본다.

  

  세상에는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영원한 우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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