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을 깨우며 먹이 달라고 앙탈을 부려댄다. 내가 어항주변에 어슬렁거리
기라도 하면 이 녀석들은 비 -보이들이 공연하는 듯 야단법석이다. 뚝배기 뚜껑 같은 무거운 몸을
가뿐하게 뒤집으며 녀석들이 안달하며 몸부림치는 통에 어항바닥에 깔린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이른 새벽 여명을 헤치며 시간을 다투는 파발마를 연상케 한다.
이 녀석은 붉은귀거북으로서 미국이 고향이란다.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와서 몸도 가누기 힘든
작은 어항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을까. 그는 우리 가족들과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감을 한다. 아마 우리 가족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고 있을게다.
시장 따라 가자는 엄마의 손을 따돌리고 게임에 열중하고는 공부만 했던 척 하는 막내의 비밀, 간혹
곤한 낮잠에 침을 흘렸을 아내의 어설픈 모습, 딸아이가 밤늦게까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비밀 지
령 같이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큰 아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몇 번이고 머리를 고쳐 빗고 옷매무새
를 고치고는 태연한척하며 으스대는 모습, 부부간의 애정을 과시하는 좀은 야릇한 모습도 그는 죄다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가 태어나기 두어 달 전에 시장에서 꼭 엄지손톱만한 청거북 두 마리를 사와
서 길렀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족이랑 진배없이 서로 간에 애정과 교감이 충분히 쌓여
서 이제는 가끔 헤어져 있는 시간이면 은근히 한 부분 그를 걱정하기도 한다.
키우면서 우여곡절이야 왜 없을까 만은 그래도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로는 가장 편한 동물이다. 며
칠씩 집을 비워도 걱정이 없다. 심지어 한 달 이상 먹이를 주지 않아도 그는 끄떡없다. 어떤 때에는 어
항을 뛰쳐나와 농 밑에 숨어서 달포이상 나오지 않아서 죽은 줄 알고 어항까지 비웠는데 나타난 적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무심하게 살아오던 중 몇 년 전에 암컷 한 마리가 죽었다. 이 녀석은 우리 집에 시집
올 때부터 골골거리며 잘 먹지도 않고 입을 뾰족하게 내 밀고는 삐쳐있었다. 시집이 영 마음에 안 들었
는지 서방이 션찮아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먹지 않으니 잘 크지도 않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어찌나 안쓰럽고 측은한지 이 녀석들을 들 여 온 걸 후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 꼼짝달싹 하지 않고 옹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어항에서 건져냈다. 아무리 얼레고 달
래도 미동이 없다. 그는 서방보다 반만큼도 못 자랐다. 한 십년간 서로가 알게 모르게 정을 쌓아 왔는
데 죽어버렸으니 가슴이 짠하다. 그를 주말농장 귀퉁이에 묻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에 배고픔을 이기려고 타국에 건너 간 이민자들을 생각했다. 거기서 곤한 삶을 이어가다
가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향에 오고 싶었을까. 자신은 이국 만리타향에
서 삶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식들에게 어떤 꿈을 전해주고 싶었을까. 너의 고향은 한국이니 그리 알거
라.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되느니라. 이런 천박한 유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리라.
지금은 나머지 한 마리만 남아서 우리 식구들과 서로 신뢰와 배려로 정을 쌓아간다. 먹이를 한 움큼
씩 줘도 금방 다 먹어 치우는 식성으로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 이놈들을 종교적인 행사의 일
환으로 강에다가 방생한 적이 있었는데, 토종 물고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어 환경을 교란하는 동물
로 분류되어 지금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이 녀석들 키우다가 귀찮다고 강에다 도로 살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십년 넘게 같이 살다보니 서로가 무감각해서 각별하고 애틋한 정은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려니 하
고 방관하듯이 키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우리 가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때때로 먹이 챙겨주고,
어항을 씻어주면서 그를 살피고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서로의 우주를 지키려고 분주하게 살다
가도 하루에 한 두 번씩 교감을 갖기 위해 눈을 맞춘다.
언젠가는 이 녀석도 죽을 것이다. 그와 내가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누가
먼저 죽든 간에 섭섭함을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동물들처럼 진한 애정으로 키우
지 않아서 안달복달 섭섭하지는 않겠지만, 책갈피에 끼워둔 빛바랜 낙엽처럼 애잔하게 스며드는 섭섭
함이 오래도록 무채색의 슬픔으로 가슴에 남을 거 같다.
유독 막내가 그의 먹이를 잘 챙긴다. 마무래도 서로에게는 남다른 애정이 있나보다. 막내 냄새가 진
하게 배어나는 그에게 좀 더 진한 애정을 주어야겠다. 서로가 인연의 끈을 놓아야 하는 때에는 좁쌀 같
은 슬픔이라도 남길 수 있어야 내 가슴이 따뜻할 거 같다. (2008. 강남문학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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