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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시실리時失里의 하계夏季

by 桃溪도계 2008.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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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時失里의 하계


   수야리 울타리의 시간이 멈춰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고향을 기억할 때마다 예전의 몸과 마음을 담았던 그대로의 모습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쓸수록 시간이 지난만큼 공간도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듬성듬성 성미 급한 몇 몇 송이가 철 이른 연밥을 매달고 따가운 햇볕에 온몸을 태울 즈음이면, 조무래기들은 설익은 연밥서리를 해서 인적이 없는 공동묘지

에 앉아 해가 저물도록 연밥을 까먹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그런 수야리의 풍경이 우리들의 우정처럼 변치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연밥서리는 고사하고 연못 주인도 그 연

밥을 거두지 않는다.

  

   정자나무 밑 봇물은 오랜 세월을 넘쳐흘러도 마르지 않고 빨래터를 제공한다.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지만 아낙들은 아직도 심심찮게 빨래터에 나와 방망이로

세월을 두들긴다. 아마도 고된 농사일과 변함없는 농촌의 일상을 냇물로 흘려보내나 보다. 기계음을 내며 손가락 하나로 빨래를 해결하는 세탁기는 빨래터 아

낙들의 마음을 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야리의 빨래터는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풍경이다.

 

   아침 안개가 낮게 드리워지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풀고 올라가던 굴뚝 연기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대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며, 감나무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수야리의 아름다운 명분을 보탠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엔 정자나무 밑에 마을 어른들이 모여 세상 걱정, 동네 걱정, 자식걱정을 하면서 고단한 삶의 피로를 푼다. 매미는 더욱 힘차게 맴맴 거

리고, 세대를 몇 꺼풀 바꾼 개도 더위에 지쳐 늘어지게 나른한 오후를 보낸다. 대체로 어른들의 나이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모습이다.

  

   그러한 수야리에는 더 이상 시간이 멈춰 있지 않다. 한적한 오솔길 따라 하늘이 맞닿는 곳엔 별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소위 예술 한다는 이들은 어울리지도

않는 현대식 시멘트 건물 속에서 갤러리를 열어 마을사람들의 경계심을 자극한다. 

  

   냇가엔 미꾸라지가 드물고, 그 무시무시하던 뱀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저수지엔 족보에도 없던 황소개구리가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세태를 조롱하고 있

다.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보낸 첩보원인 듯 농민들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감시하며, 자국 쌀과 쇠고기를 들여오는데 장애가 되는 정보를 수집하

여 인공위성으로 본국에 송신하느라 안테나를 길게 뽑아 농민들에게 겁주고 있는 것일까.

  

   수야리에 시간의 잣대가 끼어들면서 아름다움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안타까움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 곳 수야리의 언덕에 영원한 공간적 개념만을 상정해

놓고 가끔 찾아가는 고향만은 시간이 정지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고 썩어가도 나의 마음속에 곰삭힌 황토빛 노을과, 어린 아기 눈망울 같은 별빛과, 솜사탕 같은 구름과, 올망졸망 오누이 같은 산, 어

머니 행주치마 같은 들판을 나의 공간에 걸어두고 싶다.  

  

* 수야리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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