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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먼저 도착한 택시

by 桃溪도계 2009.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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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착한 택시

  

새침한 한기가 봄의 아침을 풋풋하게 느끼게 한다. 온기가 퍼지기 전에 출발하기로 예약된 기차가 마음을 바쁘게 하는 터라 곤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나에게 새벽은 저승과 이승과의 경계를 가늠하듯 가끔은 내 삶의 이정표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나아감과 물러섬, 교만함과 겸손함, 두려움과 용기, 병약함과 건강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흐느적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견스러워하기도 한다.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대로에 나왔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서울역까지 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촉박하다. 그 사이 햇살이 퍼져 전철이 미끄러지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어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른 새벽이라 택시가 많지 않다. 간간히 급하게 질주하는 택시들은 자기 갈 길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들을 잡고 시비를 걸어야 무슨 소용일까. 시간이 마음을 죄여오는 공간에서 새벽 찬 공기를 피하고 싶을 때쯤 반대편에 빈 택시가 나를 의식한 듯 조금함이 느껴진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의 눈치를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자랑보다는 서글픔으로 덤이 남는다.

  

그 택시가 유턴을 하려고 앞으로 나아가서 사거리에 신호를 대기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택시가 하이에나처럼 눈을 번득이고 있다. 나는 먼저 오는 택시를 타면 되지만 왠지 모르게 유턴하는 택시가 먼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와 묵시적으로 맺어진 인연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삶에 순서가 정해져 있었냐는 듯 맞은편의 신호가 먼저 떨어진다. 잠시 초조한 갈등이 등 뒤의 척추를 따라 서늘하게 말 갈퀴 서듯 쭈뼛 선다. 나보다 100미터 전쯤에 손님 하나가 있어 그 택시가 잠시 손님 앞에서 멈칫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다행이다 싶어 잠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택시는 그 손님을 태우지 않고 내 쪽으로 쏟아지듯 내달리고 있다. 그 뒤로 유턴하려고 기다리던 택시가 신호를 받고 경쟁하듯 달린다.

  

손님이 귀한 일요일 새벽 시간에 나 같은 사람을 먼저 태우려고 생존을 다투는 그들을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은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겠지. 하나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대 초원에서 먹잇감을 다투는 맹수들에게 나는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뛰쳐나온 겁 없는 한 마리의 영양으로 보였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택시가 내 앞에 섰다. 문을 열까 말까 고민이다. 뒤차에다 눈길을 주려는 순간 짧은 경적이 울린다. 나는 엉겁결에 앞차의 문을 열었다. 순간 유턴해서 따라온 기사의 눈빛과 마주쳤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택시는 서울역으로 향하고 내 마음은 뒤차에게 기대어 있다.

  

뒤차는 기회를 먼저 잡고도 그 기회를 뺏겼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풍경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께름칙한 모습이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생존의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그 경쟁의 승자와 패자를 내가 선택했다는 게 영 마음 편치 않은 일이다.

  

서울역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지방에 볼 일을 보면서도 언뜻언뜻 아침에 먼저 눈을 마주쳤던 택시가 오금 저리듯 명치에 남아있다. 그날 저녁에 다시 서울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려고 줄을 섰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나는 또다시 생존경쟁을 가늠하는 심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지하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 안에서 피곤한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짝 다리 짚고 서서 유턴했던 그 택시 기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택시 기사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새벽부터 길거리를 질주하며 사투하듯 생존에 몸을 던진 그 기사와 가족들이 좀 더 평안하고 행복한 꿈을 꾸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또 이런 경우가 생기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먼저 도착한 택시의 눈을 외면하고 뒤차를 타면 먼저 도착한 택시 기사에게 죄 짓는 듯한  미안함을 어떻게 갈무리할까. 삶에서 선택은 언제나 많은 번민이다. 그때마다 웃음 가득한 선택으로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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