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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지구를 돌려라

by 桃溪도계 200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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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돌려라

 

 

 

   

 

지구를 돌려라


   어디로 가야 하나. 왜 가야 하나.

  

   무작정 걸어야 한다. 행로의 경중이나 목적을 따진다면 우리는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인생은 궤도처럼 정해진 행로가 있는 게 아니다. 낮에는

햇빛 따라 걷고 밤에는 달빛 따라 걷는다. 별을 따기 위함도 아니고 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길은 더더욱 아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 생활을 통해 행군을 경험한다. 건강을 찾기 위한 행군이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설사 건강을 위한 걷기 운동이었다 한들 군대에서 하

면 힘든 훈련이 된다. 군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으면 사람이 아닌 군인이 되는 까닭이다. 

 

   “김 일병, 죽고 싶어!”

   “아닙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눈밭을 10시간 넘게 걷고 있다. 자대배치 받은 후 처음 혹한기 행군에 참여했던 김 일병은 눈자위

가 풀리고 다리가 무거워진다. 겨울의 짧은 해가 산꼭대기에 시위하듯 걸려있고 기온은 급격히 더 떨어진다.

  

   저녁식사는 라면이다. 소대에서 중고참이었던 나는 할 일이 많다. 고참들 식사 챙기고 아직 행군훈련에 익숙하지 않는 졸병들을 일일이 챙겨야 했다. 첫날 낮

행군에서 대대병력 중20여 명이 낙오했다. 그들은 차량으로 부대로 복귀한다. 이 추운 날 부대로 들어가서 따뜻한 모포에 몸을 뉘일 생각을 하면 무지 부럽다.

 

   군인 가족 분들께서 자원봉사를 나와서 라면을 끓여, 자식 같고 동생 같은 군인들에게 추위와 허기를 달래주려고 인심을 푹푹 찔러준다. 눈물 콧물을 훔치며

라면국물을 들이키면 어느새 동물적인 야성이 이성의 울타리를 넘본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등성이에는 바람이 매몰차게 불어댄다. 새벽이 되자 체감온도는 영하 30도를 넘나들어 달빛마저 차갑다. 10분의 휴식시간에

모두들 눈 속에서도 웅크리고 조각잠을 청한다. 그 짧은 시간에 전투화는 꽁꽁 언다. 종일 눈 속을 걸으면서 전투화가 젖었기 때문이다. 양말도 젖어들고 발이

시리다.

  

   다시 ‘행군 출발’하기를 반복하며 비틀거리며 걷는다. 만 하루를 걸었다. 몸이 지치고 발에는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마음도 지쳐간다. 군기로

지탱했던 행군의 의지가 퇴로를 찾는다. 자신이 왜 이 깜깜한 산골짜기에서 눈을 그렁거리며 추위에 맞서 힘들게 걸어가는지 자문한다. 아무 대답이 없다.

  

   아침 태양이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른다. 나는 눈이 퀭하니 뻐끔하고 많이 지쳐 가는데 태양은 어제와 같은 말간 모습으로 방긋이 웃으며 온 산의 눈

을 다 녹일 듯이 사기가 충천하다. 응원군 같아서 위로가 된다. 산등성이를 내려오면 된장국에 밥이다. 만 하루 만에 밥 구경이다. 혹한기에 잠자지 않고, 제대

로 먹지도 않고 눈밭을 걷는다는 현실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군인이기 때문일까.

 

   많이 지쳐있던 김 일병은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후딱 허기를 지우고는 논두렁 밑에 웅크려 잠에 곯아 떨어졌다. 배보다는 잠이 더 많이 고픈가보다. 아

직 신병인데 여기까지 무탈하게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대견스럽고 고맙다. 다시 행군이 이어진다. 육체적인 피로는 한계점에 왔으므로 이제부터는 정신력으로

걸어야 한다. 군인정신이란 이렇게 길러지는 걸까.

  

   김 일병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귀를 잡아 당겼다. 정신 차리라고 훈계하며 군기도 잡아본다. 그러나 정신력에도 한계가 왔다. 김 일병은 눈자위를 하얗게 굴

리면서 쓰러졌다. 비상이다. 양지를 찾아 뉘이고 주물렀다. 선임하사가 눈을 녹여오라고 지시했다. 코펠에 눈을 가득 담아 불을 지피려는데 불쏘시개가 없다.

천지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다. 소나무도 눈을 가득 이고 있다. 군인에게 안 되는 일이 뭐가 있으랴. 눈 덮인 소나무 안에는 마른 솔잎과 삭정이가 있었다. 따뜻한 물을 먹이고 주물러서 깨웠다. 김 일병이 탈수증을 털고 일어나줘서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았다. 그래도 행군은 계속된다. 지구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젖은 양말을 바꿔 신으려고 군화를 벗으니 먼저 잡힌 큰 물집 속에 작은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귓불이 떨어질 듯한 추위에도 발바닥은 후끈거린다. 점심은

전투식량으로 나눠 준 건빵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그립지만 찬물도 없다. 간식거리로 군장에 넣었던 두유가 꽁꽁 얼어서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배꼽까지 싸

늘해지는 두유 아이스크림을 김 일병이랑 나눠 먹으면서 목을 축였다.

  

   전쟁시 적군과 맞서서 이길 수 있는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한 행군, 이미 우리에게 그런 행군은 사치다. 김 일병은 미래의 전투력을 보충하기보다는 지금 가슴

을 가누고 있는 군기로 걷는다. 35시간 이상 걸었을까. 뜨겁던 가슴엔 식은 연탄재처럼 차가운 구멍이 숭숭 나고, 휴가 갈 때 입으려고 세웠던 다림질 주름처럼

빳빳하던 군기도 너덜너덜해져 누더기가 되어간다.

  

   김 일병은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울면서 매달린다. 그는 육체적인 피로도 한계를 넘었지만, 걸어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상실해서 초주검이 되었다. 나는 독기

를 품으며 그의 귀싸대기를 거푸 서너 번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그의 군장을 뺏었다. 울면서 뺏기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 다른 동료가 군장을 대신 들어줬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면서 뜨거운 피를 흘려보냈다. 그의 손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튿날 저녁도 라면이다. 라면국물에 온몸이 녹는다. 김 일병도 얼굴에 화색이 돈다. 참 다행스럽다. 김 일병이 자기 군장을 다시 받아 메었다.

  

   “김 일병도 낙오하지 그래.”

   “아닙니다.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랬다. 첫날 행군에서 낙오병 대열에 들지 않았던 병사들은 시간이 흐르고 지쳐갈수록 낙오하지 않는다. 군기와 보람으로 버텨온 행군이 길어질수록 포기

할 수 없는 새로운 힘이 가슴에서 뜨겁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계속 걸을 수 있다. 김 일병 앞에서 당당하게 큰 소리쳤던 나도 많이 지쳐갔다. 체력과 수면부족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를 돌리는 속도는 급격히 느려지고 날씨는 더욱 차가워진다.

  

   밤길에 산등성이를 걸으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많이 지쳐있던 나도 대열에서 몇 번이나 이탈했다. 낭떠러지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멈추는 횟수가 늘어갔다.

그때마다 김 일병이 잡아챘다.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눈을 감고 비척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것은 숙명

이었다.

  

   행군은 깊어갔다. 10분간 휴식시간이면 아무렇게나 눈에 뒹굴어져서 모자란 졸음을 채운다. 몸이 얼어가고 감각이 둔해지는 추위도 두렵지 않다. 세상에는

오직 한 길만 있다. 내가 이 험난한 행군을 끝까지 마치는 것.

  

   마지막 행군코스는 운악산 정상을 넘어서 부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오후가 되자 눈보라가 몰아친다. 폭설주의보가 발령되고 상급부대에서는 행군을 포기하

라는 무전을 연신 날려댄다. 대대장은 결심을 해야 한다. 병력을 모아놓고 논두렁에 올라가서 입술을 굳게 깨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꽃송이 같은

세찬 눈발이 철모르게 흩날린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운악산 935고지를 점령해야한다.”

   “그 결정은 오직 여러분이 한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죽기를 각오하고 진군할 것이다.”

 

   일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다. 병사들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양손을 들어 대대장에게 계속 진군할 것을 함성소리로 응답했다. 함성소리는 점

점 커지고 우리들의 가슴에 소름끼치는 전율이 일었다.

  

   “전 장병은 지금부터 운악산 고지를 점령한다.”

   “돌격 앞으로!!!”

  

   72시간에 걸쳐 200km를 행군했다. 2박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않고 앞으로만 걸었다. 사상 유례가 없는 행군이었다. 다른 부대에서 시

행하는 400km 행군은 숙박을 하면서 보름 이상을 하는 전술 행군이기 때문에 방법과 목적이 조금 다르다.

 

   운악산을 내려올 때는 밤 10시쯤 되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로부터 순간만이라도 이탈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 차 있다. 달빛이 하얀 눈을 비추고, 나는 패잔

병 같은 몰골로 군화를 끌면서 달그림자에 비친 또 다른 나를 껴안고 부대로 복귀한다. 부대장이 전해주는 한 잔의 막걸리는 무슨 의미였을까. 김 일병과 서로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김 일병의 발에는 물집이 세 겹으로 잡혔다. 처음 잡혔던 큰 물집은 눈밭을 걷는 동안 불어서 저절로 터졌다. 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세상

을 얻은 자신감에 가슴이 뜨겁다고 했다. 혹한과 눈밭을 누비며 지구를 200km나 돌렸다는 자부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심한 훈련 뒤에는 많은 부작용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이 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구를 돌렸다. 내가 국민이 될 때 나는 또 다시 군인에게 지

구를 돌려달라고 주문할 것이다. 지구가 돌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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