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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아름다운 만남

by 桃溪도계 2007.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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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만남


   그의 나이 18세 되든 해, 그와 우리 가족과의 인연이 시작 되었다. 당시 그의 신분은 거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어머니 직업이 거지였고, 그는 동생 한명과 함께 거지 어머니 따라 다니며 밥 얻어먹는 거지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비록 햇볕에 그을린 얼굴 이었지만 미녀형의 얼굴 이었으며, 신혼시절에 가혹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정신을 살짝 놓아 버린 후, 이십년 넘게 떠돌이 동냥생활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그들 모자는 우리 마을에도 수시로 다녀갔기 때문에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경남 함안의 어느 동네 사람이고, 자기 동생과 자기와는 아버지가 다르다고 했다.

  

   그와 우리 아버지와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는 첫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는 우리 집에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안절부절 했다. 아들 하나를 떼어 놓고 동냥 다닌다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던 모양 이었다. 수시로 와서 아들 잘 있는지 확인하고 같이 가자고 그를 구슬렀지만, 그는 가지 않고 우리 집에서 묵묵히 농사일을 배웠다.

  

   그때까지 그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주민등록번호가 없었다. 어머니의 수고로 호주가 되어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어머니는 그의 동생을 친척집에 소개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그의 어머니에게서 떼어냈다. 그 이후 그의 어머니는 혼자였으며, 둘째 아들을 잃어버린 상심을 추스르지 못해 몹시 불안 해 했다.

  

   가족의 일원이 되어 처음에는 밥상에서 밥을 떠먹지 못하고, 밥그릇을 들고 방바닥에 내려서 먹어야 할 만큼 그에게는 가족의 문화가 없었다. 배움도 없는 백지상태였으므로 일을 하는 폼새나 말투, 사고방식 등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꼭 닮아갔다. 그는 열심히 일 했으며, 아버지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했다. 짬짬이 어머니한테 국어랑 산수도 배웠다.

  

   햇수가 거듭 되면서 그는 일꾼으로 거듭 났고, 세경도 점점 올라 그의 통장은 나날이 불어났다. 그 쯤 해서 어머니는 영농후계자 등록하고 농지구입자금 대출하여, 그가 그동안 저축한 세경이랑 합쳐서 밭을 구입해서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몇 년 후 복숭아나무에서 소득이 생기기 시작 했다. 농약, 비료, 거름 등 모든 농사비용을 아버지가 부담했기 때문에 알찬 소득 이었다. 아버지가 다른 밭에 뿌리려고 준비해 놓은 거름도 그는 틈만 나면 자기 복숭아밭에다 뿌리는 기발함도 보였다.

  

   그의 농장이 점점 커지기 시작 하면서 아버지는 그에게 세경을 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 아버지의 농장은 전부 소작농인데 반하여 그는 자작농 이었으며, 농사 량도 절반정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아버지와 그는 협동농장 형태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평생 땅 한 평 없는데 반해, 그는 부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동네에서 가장 순수하고, 착실하며, 매력적인 일꾼이 되었다. 그가 스물다섯 살쯤부터 아버지는 그의 혼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결혼하기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어서, 틈만 나면 결혼시켜서 독립된 가정을 이뤄주기 위하여 걱정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되 든 해 일반인이 보기에는 완전치 못한 아가씨와 결혼 했다. 그때 동네 할머님들은 그에게 부조를 했다. 몸이 불편해서 예식장은 가보지 못하고,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자기 자신에게도 쓰기를 망설였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두서너 장을 그의 손에 꼭 쥐어 주면서, 당신이 죽으면 꼭꼭 잘 묻어 달라고 부탁 하셨다.

 

   그는 동네에서 가장 성실한 일꾼 이었으며, 요령을 피지 않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경험에 의한 판단은 정확했다. 그의 결혼식 때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혼주석에 앉으셔서 지난날을 회고 했다. 결혼식이 끝난 일주일 후 아버지는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 하셨다.  ‘내가 영후만 결혼 시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각본대로 사십여 일 만에 세상을 버리셨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첩에서 예쁜 태국 아가씨 사진 한 장을 발견 했다. 어머니께 여쭸더니, 몇 년 전에 회갑기념 태국 여행 갔을 때 가이드 담당했던 아가씨였는데, 영후랑 결혼 시키고 싶어서 받아온 사진이었다고 한다. 미처 그 사진을 꺼내 정리할 겨를도 없이 매정하게 인연의 끈을 놓으셨다. 

  

   그는 몇년전에 새롭게 집을 지어서 분가를 했다.  농사일은 어머니와 같이 협동해서 한다. 그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할머니의 정을 쫑알쫑알 물어낸다. 물론 학교 뒷바라지는 어머니 몫이다. 그가 가끔 가족들을 트럭에 태우고 바람 쐬러 가는 뒷모습에서 아직도 그와 아버지와의 만남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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