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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꽃순이를 아시나요

by 桃溪도계 2007.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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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순이를 아시나요

 


  

  설움이 꺼이꺼이 울어대던 꽃비 내리는 봄밤에 흔적 없이 떠났다.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마누라 두들겨 패고, 자신을 옥죄어 오는 그 무엇을 주체하지 못하여 짚동가리에 불을 지르고, 봄이 설익은 무논에 천방지축으로 뛰어들던 그는 술이 깨면 지난밤에 자신이 저질렀던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후회한다.

  

  참혹하리만치 무서웠던 남편의 망나니 같은 등쌀을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해거름이 내리는 처량한 봄밤에 자식 둘 남겨두고 독기를 품으며 아름다운 꿈을 묻었다. 꿈도 희망도 무너져 내린 가슴은 아픔도 자랄 수 없을 만큼 척박해졌다. 가슴속을 눈물로 가득 채우고 미친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의미가 있지’

  ‘얘들이 너무 불쌍해’

  ‘부모 잘못 만난 게 죄라면 죄지’

  ‘내가 죽일년이여’

  변명과 후회와 슬픔을 가슴에 비벼대는 일상도 그럭저럭 2년이 지났다.

  

  마누라 없는 휑한 집은 황폐화 되어갔고, 어린 자식들 보듬어 안고 정신을 똑바로 세우려고 애를 쓰던 남편의 다짐은 별 저항 없이 허물어져갔다. 아이들도 혼돈의 세상을 힘겹게 버텨가고 있었다.

  

  꽃순이는 들꽃을 머리에 꽂기를 좋아했으며, 사소한 일에도 히죽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의 덤벙 걸음은 항상 발뒤꿈치에 웃음을 달고 다녔다. 그는 불행의 인자를 많이 덜어내었으므로 대체로 근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도 혼란스러운 가정은 그녀의 심장을 압박해 왔다.

  

  집을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꽃순이를 가슴에서 놓아 본 일이 없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는지, 또래 애들한테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는지, 숙제는 제대로 하는지, 옷매무새가 허술하지 않도록 옷은 빨아 입고 다니는지, 무서운 아버지의 술타령에 주눅 들어서 기도 못 펴고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행여 나쁜 어른들이 해코지나 하면 어쩔까. 밤잠을 설치는 날이 부지기수다.

  

  짧은 해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던 봄밤에 학교 갔던 꽃순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데리고 갔나. 자신이 목표를 정해서 떠났나. 혹시나 길을 잘 못 찾아서 알지도 못하는 길을 걸어갔나. 사방팔방 다 뒤져도 꽃순이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꽃순이는 엄마가 없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 도피한 게 아니다. 꽃순이는 현실을 도피해야 할 만큼 세상이 어렵지 않았으며, 도피할 방법과 요령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는 아니었다. 꽃순이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신비한 재주를 가진 아이였기 때문에 엄마가 집을 떠날 때처럼 봄밤에 떠난 건 맞지만, 엄마처럼 꿈을 찾다가 지쳐서 현실을 비관하여 도피한 건 아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고 펄떡거리는 영혼을 재울수가 없다. 날마다, 밤마다 가슴을 태워도 연기만 자욱할 뿐 재가 되지 않는다. 가보고 싶었지만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남편이 무서워 가 보지도 못했다. 제 이름자 겨우 기억하던 꽃순이를 찾을 수가 없다. 이제는 태울 가슴도 없다. 밤마다 통곡을 하며 울어보지만 가슴이 비워지지가 않는다.

  

  꽃순이가 보고 싶어서 절절이 그리운 세상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남편의 술주정도 무섭지 않을 만큼 용기가 생기고, 아픔도 오래된 상처처럼 무뎌져 가던 봄날에 그가 죽었다. 이제는 그를 두려워 할 일도 없는데 만날 일도 없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꽃순이를 찾으러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지금쯤 꽃순이를 찾았을까. 야속하지만 소식 좀 전해주면 안되나.

  

  꽃순이는 엄마의 가슴을 열어 젖 달라고 조르며 보채지만, 세월이 지칠수록 엄마의 영혼에서 맴돌 뿐, 더 이상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이제는 쩍쩍 갈라진 가슴을 채울 눈물도 메말랐다. 살아간다는 게 우울할 뿐, 슬픔도 기쁨도 감정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이십년 이상 겉돌고 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내 가슴을 울음으로 가득 채울 꽃순이를 아시나요. 내 영혼을 비워서라도 꼭 한번 보고 싶은 꽃순이를 아시나요.

  

  들꽃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꽃순이를 모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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