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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딸아이의 졸업식

by 桃溪도계 2007.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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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    업

 

  

 

  졸업은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삶은 ‘졸업’ 이라는 외줄에서 기우뚱거리며 간신히 ‘시작’ 이라는 다음 발을 내 딛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졸업을 잘 해야 시작하는 다음 발을 안전하게 디딜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졸업과 시작의 연속선상에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매순간 닥치는 졸업에 대한 허물만 덮어주면 다음 시작부터는 잘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 자기변명을 숙성시킨다.

  

  큰 아이가 중학교 졸업을 한다. 물론 고등학교 입학이라는 다음 과정을 밟기 위한 힘찬 물길 질이다. 아직까지는 제 멋에 품격 없이 자라왔지만 차츰 현실적인 환경을 인식하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배려하는 상식을 익히며,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는 시기다.

  

  학생의 신분이니까 공부를 위한 종종걸음에 정신없지만, 그 보다는 참된 인생을 익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인생이고 종교이며 절대자 그 이상이다. 그들에게는 신선한 시작이어야 할 졸업의 의미가 행색이 초라하게 퇴색한 찻집의 무의미한 일상 같다. 삶을 영위해가는 한 방편으로 공부가 필요하지만, 공부를 위한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삼십년 전, 학비부담에 대한 곤궁함을 해결 할 길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짓지 못하여 부모님은 몸살을 앓았다. 안개 속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가려고 발버둥 치며 밤마다 쓰라린 가슴을 끌어안고 자식 공부 시킬 방도를 찾기 위해 끙끙거리다가 큰 결심을 했다. 해보고 안 되면 퇴학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더라도 일단은 학교에 보내야겠다.

  

  어차피 대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취직할 수 있는 방편을 위안으로 삼고 대구에 있는 상업학교에 원서를 제출했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 혹시나 자식이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면 입학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겨울만 되면 땔 나무를 하기위해 짊어졌던 지게를 내 팽개치고 울산에 있는 아파트 공사장에 노동일 가셨다.

  

  오직 자식 공부를위한 입학금을 마련해야 된다는 신념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이길 수 있게 했으며, 평소에 좋아하시던 술 까지도 억지로 외면해야 했다. 몸을 녹일 수 있는 잠자리 비용을 아끼려고 아파트 현장 한 켠에 매서운 바람을 비닐로 가리는 정도로 침실을 대체했다. 고된 노동일에 몸이 지쳐가면서 나중에는 병 까지 얻어서 고생하셨다.

  

  그해 중학교 졸업식에 아버지는 참석하시지 못하셨다. 고등학교 입학 할 즈음에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에게 줄 갖가지 선물보따리를 잔뜩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하게 금의환향 하셨다. 아버지는 비쭉비쭉 삐져나오는 그간의 고생을 꽁꽁 숨기시고 부르튼 입술로 무용담을 늘어놓으셨다. 자식을 위한 자신의 지난 겨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람을 마음껏 자랑하셨다. “내가 여태까지 인생 살면서 자식이 고등학교에 시험 되었다는 편지 받았을 때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고생은 되어도 힘은 안 들었다.” 며 입술을 깨물며 얘기 할 때는 눈물까지 글썽이셨다.

  

  딸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삼십년 전의 아버지를 떠 올렸다. 자식의 고등학교 입학금 마련을 위해 즐겁게 추위와 맞섰던 소중한 땀방울을 딸아이에게 유전시켜주고 싶다. 딸아이가 내려놓는 새로운 발자국마다 아름답고 영롱한 땀방울의 의미가 새겨지기를 희망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졸업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흔히들 말하는 종지부를 찍는 의미의 졸업보다는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담뿍 담긴 졸업을 생각하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졸업 때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울컥거리고 작고하신 아버지의 졸업을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는 인생을 잘 졸업하셨을까. 미련도 후회도 없는 인생이었을까.

  

  나는 매 순간 어떤 졸업과 시작을 엮어나가고 있을까.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자리를 제대로 비우지도 못한 채 졸업을 맞으며 잘난 체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허물로 가득 찬 마음을 졸업이라는 담요로 적당하게 덮어버리고는 돌아서서 시시덕거리며 살아가는 건 아닌지.

  

  맞다. 나는 매번 주어진 과정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채 졸업에 임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살아왔다. 내 마음이 허세로 가득 차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틈만 있으면 마음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헛된 욕망과 거들먹거림으로부터 조금은 유연한 넉넉함으로 부끄러움도 살펴가며 매듭을 풀어가고 싶다. 나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담을 수 있는 졸업을 위하여 설거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나의 시작은 졸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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