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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범이

by 桃溪도계 200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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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이


  작은 마을에 전기불이 처음 들어오던 날처럼 호기심과 영웅심이 겹친 경사가 들었다. 한바탕 잔치를 벌일 심산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발걸음을 쫑쫑거리며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아이들의 볼기짝은 저절로 넓어지고, 어른들은 붉은ㆍ노란ㆍ

파랑 천에 알 수도 없는 한문으로 된 붓글씨를 쓰고 대나무에 매달아 깃발을 만든다. 아낙들은 음식 장만하느라 바쁘고 바깥 양반들은 거들먹거

리는 어깨를 추슬러 억지로 겸손을 갖춘다.

  

  냄새를 맡은 똥개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졸졸 뒤따르는 해질녘에 마중을 간다. 꽹과리, 북, 장구, 징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날나리를 불어대며

동네가 취하도록 농악을 울린다. 아랫동네를 지날 때는 북이 찢어지고 아이들은 울대가 터지는 줄도 모른 채 제 흥에 묻힌다. 그러다 마치 약속이

나 한 듯이 악을 써대던 농악 소리가 멈추자 어스름이 내리는 벌판길에 횃불이 올랐다.

  

  범이였다.

  

  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자랑스럽게도 넓은 등짝에는 붉은ㆍ노란ㆍ파란ㆍ하얀 천을 둘렀으며, 머리에는 투혼의 흔적을 미처 다 지우

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의 칼같이 잘 생긴 뿔 주변에는 아직 피가 배어나오고, 비린내 나는 온기가 콩닥거리는 나의 가슴에 전율을 일으키며 멈칫

거린다. 

  

  상쇠가 꽹과리를 깽깽거리며 신명을 돋우자 이내 들판이 들썩였다. 범이는 준비해 간 뜨끈뜨끈한 여물통에 긴 혀를 내밀어 휘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쭉 뺀다. 사투를 견뎌 낸 힘겨움에 입맛을 잃었나보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물려있다. 물통에 두서너 번 혀를 내둘러 찍어보고

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싫다는 범이의 고삐를 잡고 막걸리를 바가지에 담아서 입을 벌리고 넣어준다. 이내 갈증을 풀었는지 기운을 차

린다.

  

  동네로 돌아오는 길은 잔치판이다. 늠름한 모습으로 금의환향한 범이는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평생을 살아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작은 농촌마

을에서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범이가 ‘영남투우대회’에서 ‘을종’ 부문에 1등을 하다니, 더없는 영광이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범이는 청도댁에서 기르는 싸움소다. 소가 태어나면서부터 호피무늬를 덮어쓰고 태어나서 ‘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변에 얼쩡거리기만 해도

그의 카리스마에 간장이 서늘해진다. 그렇지만 범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없이 착하고 순했다. 그의 가슴은 청도댁을 닮아서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청도댁은 서리서리 맺히는 질투가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넘어와도 내뱉는 일이 없다. 청도어른은 일찍이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눈 맞은 첩이랑

이웃동네에서 주막집을 하며 산다. 그 많은 농사일을 청도댁 혼자서 콩이야 팥이야 타령으로 지으며 살아가지만, 청도어른은 손끝하나 얄랑이지

않고 피둥피둥해진 손바닥으로 세월을 꾹꾹 눌러가며 살아가는 한량이다.

  

  범이가 처음 오던 날, 청도댁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청도어른은 본인이 키운다며 염려 말라고 큰소리쳤지만 청도댁은 앞으로 펼쳐질 일을 손

금 보듯 알고 있었다. 농사일만으로도 혓바닥이 빠지는데, 거기다가 싸움소까지 기르려면 몸뚱이가 열 개 있어도 못 당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청

도댁은 콩콩 뛰면서도 더 일찍 일어나서 쇠죽을 끓이고 정성을 들이며 서방삼아 범이를 키웠다.

   

  ‘범이가 큰일을 해낸 거여.’

  ‘청도댁 눈물을 먹고 자란 놈이지.’

 

  범이는 청도댁의 애잔한 사랑 갚음을 하려고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느라 뿔을 크게 다쳐 뿔이 흔들리고 있었다. 청도댁은 곁에 쭈그리고 앉아 계

란을 풀어서 마사지를 해주며 피곤한 범이를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퍼부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자신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을 범이를

향해 그동안 쌓였던 한 서린 울먹임을 토해내며 앙탈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여우같은 첩에게 서방 뺏기고 생과부 된 년이…”.

  “한평생 화장 한번 못해보고 남자일 여자일 가리지 않고 소처럼 일만해야 되는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

  “뭔 팔자에 없는 복이 터져서 범이 너를 만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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