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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구룡산의 오월

by 桃溪도계 2006.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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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의 구룡산은 정갈한 향기가 듬뿍 배어나오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산자락은 어머니 치마폭 같다. 북쪽 자락으로는, 오갈 데 없는 이들을 구룡마을에 감싸 안고 솔개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여 안식처를 제공한다. 남쪽 자락으로는, 국가의 미래가 달린 국가정보의 요람을 품어 안았다. 군데군데 헤진 치마폭 사이로 밭을 일구고, 병원과 종교사를 제공하여 병들고 가슴이 어두운 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치마폭을 살짝 들어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계곡을 따라 중턱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아카시아가 터널을 이룬다. 아카시아 꽃향기에 흠뻑 젖어 내 땀방울 속으로 그 향기를 밀어 낼쯤 이면 풋풋한 처녀의 배꼽 같은 개암 약수터에 이른다.

 

  그 옛날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주던 건국설화의 주인공인 여인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목을 축이고 한숨 돌린다. 조금은 가파른 길을 계속 올라가면, 속치마 질끈 치켜 올린 젖 무덤사이로 아카시아나무와 소나무들이 키 재기 하듯 아옹다옹 향기를 다툰다. 아카시아 꽃향기와 소나무의 송진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선한 싱그러움에 콧속이 시리다.

 

  아카시아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날에는 아련히 저물어가는 유년의 오월을 기억한다.

 

  오월의 푸른 햇빛에 밀밭의 종다리가 앞 다투어 알을 품고, 아카시아 그늘 밑에서 향기에 취한 이방인이 하품 섞인 눈꺼풀을 껌뻑인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비릿하고 조금은 느끼한 아카시아 꽃잎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땅 찔레순의 달싹함으로 허기를 달래며 재잘거린다.  설익은 햇감자 서리해서 허겁지겁 꼴망태에 집어넣어 개울가에서 구워 먹으려고 연기를 피우면, 숨죽이며 따라 왔던 아카시아 향기는 연기 속으로 몽실몽실 내 꿈을 피워 올렸다.

 

  구룡산의 가슴팍을 지나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정상에 오른다.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확 튀여, 서울시가지의 고층 빌딩들과, 멈추는 듯 멈추는 듯 흘러가는 한강과, 북한산의 장엄함이 가히 천하를 경영하기에 충분함을 느낀다. 남쪽으로는 굽이굽이마다 펼쳐지는 청계산과 관악산의 신록이 태평양의 깊고 푸름을 닮아 있고, 그 가운데로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한걸음에 내달을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의 친근함이 어울려 향수를 자극한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단아하고 정갈한 여인의 이마와 꼭 빼어 닮은 정상에서, 그 옛날 아홉 마리의 용이 양재천에 내려온 전설을 되새기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미래를 이야기하며 산을 내려온다. 빼어나지 않고 그리 수려하지도 않으면서 높지도 않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가를 기억하게 하는 구룡산의 오월을 깊은 호흡으로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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