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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山 行

11. 아! 지리산

by 桃溪도계 2006.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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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 2006년 6월 4일

2. 산행코스 : 성삼재 - 노고단 - 삼도봉 - 토끼봉 - 연하천 - 벽소령산장 - 칠선봉 - 세석산장 - 촛대봉 - 장터목산장 - 천왕봉(1,915m) - 법계사 - 중산리

3.산행시간 : 15시간(2006년 6월 4일 새벽 3시 30분 출발, 6월 4일 오후 6시 30분 하산)


  거기는 내가 안길 곳이 아니었다.

 

  그가 옷고름을 풀고 먼저 품기 전에는 에둘러 사랑을 상상하지마라. 행여 외로운 마음에 섣부른 동정으로 사랑을 변명하다가는 치마폭에도 얼씬거릴 수 없다.

 

  새벽 3시 30분에 성삼재를 출발하여 노고단으로 오른다. 깜깜한 새벽에 후레쉬 불빛으로 첫 만남의 설렘을 맞는다. 어제 저녁에 출발하여 버스에서 잠을 청했으나 제대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잠이 설익어서 몸이 노곤하고 피곤이 묻어 있지만, 지리산이 뿜어내는 활기찬 기운을 흡입하면서 뻑뻑하게 몸속을 굴러다니던 피의 흐름도 차츰 부드러워졌다.

 

  노고단에서 능선을 따라 삼도봉을 향해 가는 길에 여명이 밝아왔다. 일출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 꺼풀씩 벗겨지는 그 웅장함이 신비스럽다. 안개구름을 가득 품어 안고 쪼끔씩 내어 보이는 능선의 실루엣은 나를 흥분시킨다. 천상의 여인이 비칠 듯한 천으로 몸을 가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팔을 궤이고 세상을 관조한다. 그 위엄에 가위눌려서 감히 내가 당신을 품으려고 왔노라고 입을 뻥긋할 수가 없다.

 

  삼도봉, 토끼봉, 칠선봉을 지나 세석산장까지 이어지는 산행은 임을 만나러 가는 주단길이 아니었다. 혈기 충천하여 멋없이 껄떡대는 머슴 같은 사내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만들어 놓은 길이다. 능선을 따라 10여개의 고산준봉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지칠 때까지 걸어야 한다. 입에는 단내가 나고 하늘은 노랗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는다.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나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네.’

  ‘힘이 들어요.’

  ‘그럼 자네는 돌아가게.’

 

  혼자 독백처럼 곱씹으며 무리한 종주 산행을 후회도 해 보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을 누가 만들었던 간에 길은 그냥 걸어갈 수 있는 길일뿐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금강산이나 설악산과는 다르다. 꾸미지 않으며, 세상이 뭐라하던말던 상관 않고 하늘을 이불삼아 무덤덤하게 턱 엎디어 있다. 천지를 뒤 흔드는 개벽이 일어나도 꿈적도 않을 것 같은 품새가 절로 믿음이 간다.

 

  산을 좀 헤아린다는 이들은 이런 지리산을 남성다운 상징을 제대로 품은 산이라고 말한다. 지리산을 가슴에 품고 꺾이는 호흡으로 체취를 느끼면서 땀에 푹 절여질 때쯤이면, 남성적인 힘이 온몸을 싸안으면서 끌어안는다. 사내대장부 같은 믿음직스러운 힘이 느껴지니까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나는 좀 다르다.

 

  세석평전에서 잠깐 허기를 달랬다.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길은 험준하다. 이미 육체적피로점은 한계에 왔다. 새벽부터 9시간을 걸었으니 더 이상 걸음을 떼어놓을 명분과 힘이 모자란다. 촛대봉 쪽을 올려다보니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계단길이 버티고 있다. 세석평전에서 발길을 돌려 길상암쪽으로 하산을 생각하며 잠시 갈등했다.

 

  智異山은 남성적인 품새를 하고 있지만, 그는 속 깊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세상 풍파에 힘들고 지친 어리석은 자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면 지혜를 내어주는 그런 산이었다. 겁 없는 무리한 산행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천왕봉을 배알할 힘이 없지만,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지혜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몸이다.

 

  지친 몸이야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추스르면 되지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아우를 수 있는 지혜가 고갈되면 내 육신의 존재는 생존의 의미를 상실한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정신적인 지혜를 얻으러 천왕봉행을 강행한다.

 

  장터목산장에서 목을 축이며 몸단장을 살피고 정상을 향한 가파른 등산길에 오른다. 유월의 햇빛이 날카롭다. 햇볕을 가리려고 썼던 모자에는 허옇게 소금기가 서려있다.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후회반 희망반이다.

 

  수백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다 쓰러진 고사목 군락이 지친 인사를 건넨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갈라져 내려오다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품어 안고 멈춰서 우뚝 서 버렸다. 백두에서 내려와 여기 삼도의 땅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세상만사를 치마폭에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히 이어져오는 아름다운 민족의 정기를 지키고 있는 천왕봉이여. 드디어 정상이다.

 

  구름 떼가 몰려다니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햇볕이 내리쬔다. 천왕봉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게 놀랍다. 나름대로 세상을 잘 살아갈 것 같은 사람들도 겉보기와는 다른 모양이다. 천왕봉 봉우리에는 철 모자라는 어리석은 자들이  슬기로운 지혜를 달라고 안달복달이다.

 

  하산 길은 중산리 쪽을 택했다. 3시간에 걸쳐서 온통 돌밭 길을 내려와야 하는 길이다. 지리산 종주는 고행에 가까운 힘든 산행이다. 내게 어떤 지혜를 줄까 생각한다.

 

  지리산은 내가 힘들다고 달려가면 덥석 안아줄 것 같은 어머니 같은 산이지만, 그렇다고 버릇없는 아이처럼 아무 때나 칭얼거리면 안아주지는 않는다. 그는 내가 보고싶을때 생각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다.

 

  나의 어리석음이 쌓여 무너질 것 같아서 지혜를 얻으러 지리산을 찾아왔지만, 아직은 지리산을 찾을 품격이 모자란다. 그렇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모든 이들이 막무가내로 안길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 나는 그를 기다려야한다.

 

  아! 지리산이여.

 

  함부로 당신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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