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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말짱 도루묵

by 桃溪도계 2006.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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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 전까지 농어목 도루묵과에 속하는 도루묵의 이름은 ‘묵’이었다. 선조 임금이 동해안에 피난 갔을 때, 진상에 올라온 ‘묵’의 맛이 일품이고 귀품 있는 은빛 자태가 아름다워 ‘은어’銀魚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난리가 끝나고 평온을 되찾자, 선조는 난리 때 감칠맛 나게 먹었던 은어가 생각나서 구해 오게 하였다.
 
 

신하들은 싱싱한 은어를 진상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 임금님께 올렸는데, 난리 때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먹었던 맛이 아니라서 도로 물렸다. 신하들이 임금님께 진상하기 위해 기울였던 온갖 노력이 허사가 되고 도로 물리는 처지가 되었다는 우화에서 ‘묵’이라는 생선은 ‘은어’도 아닌 ‘도루묵’이 되어 말짱 도루묵 되었다 한다.
 
 초등학교 2학년인 막내가 허둥대며 현관문을 힘차게 열어젖히고 가방을 던지다시피 팽개치며 엄마를 다급하게 불렀다.
 “엄마”  “오늘 사회시험 정답 뭐라고 썼는지 알아” 라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문제가 뭔데”  “그게 있잖아, 음...”
 “물 한잔 마시고 천천히 말해봐” 엄마가 아이의 호흡을 다독였다. “음...” 
‘고양이 한 마리가 생선을 훔쳐 먹으려고 담 구멍으로 들어갔다. 고양이가 생선을 맛나게 훔쳐 먹고는 배가 불러서 들어갔던 구멍으로 도로 나올 수 없었다. 그 고양이는 배가 꺼질 때까지 며칠 동안 굶었다가 다시 홀쭉해진 후에 들어갔던 구멍으로 되돌아 나왔다.’ ‘위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줄여서 쓰세요.’ 아이가 기억하는 사회문제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히히히....”  “뭐라고 썼게”  “글쎄”  “말해봐” 아이는 엄마의 채근에 쑥스러운 듯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엄마는 궁금이 더하여 바짝 당기며 물었다.  “답을 뭐라고 적었는데”  “그게 있잖아”  “음.... 히히히”  “말짱 도루묵이라고 썼어”  순간 엄마는 장난기 섞인 아이의 사회문제 정답에 할 말을 잊었다. “엄마, 나 잘했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뭔가 좀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답에 대하여 용서받으려는 듯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귀를 쫑긋 그렸다.  “어떻게 그런 답을 생각했어, 우리 아들 다 키웠네.”
 
 아이는 도道 통했나 보다. 거창하게 계룡산에서 몇 년간을 수련하지 않고, 그냥 천진하게 학교만 다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의 눈동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는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잇속을 따지지 않고, 환경이 주어지는 대로 만족할 줄 알았으니까 어른들이 평생을 공들여도 쉽게 찾지 못하는 진리를 터득한 건 아닐까.
 
도자기는 외향도 아름답지만, 천년의 세월 동안 이름도 모르는 도공이 한 호흡으로 무심히 스치듯 사심 없이 빗어낸 지문의 흔적에서 자연에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아이가 찾아낸 말짱 도루묵이나 도공의 지문에서 초월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뭔가를 의도적으로 채우거나 잘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했다면 찾을 수 없었을 아름다움이다. 의도되거나 채우려는 욕망이 배제된, 목적되지 않는 삶 속에서 진주가 자라나 보다.
도공은 단지 빈 공간을 확보해야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려고 했지, 천년 후에도 생동감 있게 숨 쉬는 지문을 그려 넣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선물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왜, 인간의 본성은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 뜨지 못할까. 기를 쓰고 채운들 다시 비워야 하는 자연의 순리를 깨닫지 못할까.
욕심부려 배를 채운 고양이가 굶어서라도 속을 비워내야 자기 위치로 되돌아올 수 있듯이, 도공이 빚은 아름다운 도자기도 비루한 욕망을 비우지 않고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헛된 욕심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아주 조금의 물질과, 맑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다시 토해 낼 지라도 꾸역꾸역 집어넣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일생동안 추악한 물질 욕망의 덫에서 헤매며 의미 없이 살아간다.
 
 

금전과 물질에 대한 과한 욕망은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굴욕스럽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채우고 가진 들 다시 뱉어야만 자기를 찾을 수 있듯이 진정한 아름다움은 욕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빛이 투영되는 진실된 삶이다. 금전과 물질로만 채워진 욕망의 자리에 텃밭을 내어 아름다운 마음의 씨를 뿌려서 거둔 그 열매의 담백한 맛을 찾아야 한다.
 

물질로서 욕망을 채우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아이는 황금이 인격의 기준이 되는 물질만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며 아름다운 삶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황금만이 세상의 진실을 대변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아이에게 과한 바람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되짚어 보며 삶의 가치 기준을 생각해본다.  

 

인생 자체가. 살아간다는 자체가. 말짱 도루묵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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