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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보리밥

by 桃溪도계 2006.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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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현대의 식생활은 점점 서구화 되어간다. 기름진 식생활로 비대해진 몸이 성인병의 단초임을 익히 알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비만을

해결하려 갖은 운동을 하고, 성인병을 얻으면 병원신세를 지면서도 좀처럼 먹을거리를 바꾸지 못하는 건 인간의 나약함일까. 굳센 고집일까.

 

   보리밥이 현대인들에게 웰빙식으로서 튼실하게 자리를 굳혀가지만 나는 아직 보리밥을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때때로 보리밥집에 드나

들지만 웬만해서는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 흰 쌀밥이 먹고 싶어서 보리밥을 피해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흘러 들어왔는데, 동료들이 별식이라

면서 보리밥 먹으러 가자면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나 혓바늘이 돋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기던 때, 겨우 젖 떼고 밥 먹기 시작하던  동생이 설사를 만났다. 엄마는 동생이 억센 보리밥을 소화하지 못해서

설사하는 줄 알고 이웃집에서 쌀을 빌려와 보리밥 틈에 쌀밥을 조금 지었다. 점심때가 되면 동생에게 쌀밥을 먹이라고 단단히 당부하고는 모심으러 가셨다.

  

   아파서 칭얼거리는 동생의 손을 잡고,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엄마 없는 고아들처럼 허기에 익숙해진 눈을 껌뻑거리며 긴긴 하지의 점심때를 기다렸다. 엄마

가 시키는 대로 주발에 담아 놓은 쌀밥 한 그릇과 보리밥 한 그릇을 퍼서 동생이랑 마주 앉았다. 동생에게는 쌀밥을 주고, 나는 보리밥을 들고 앉았는데 동생이

자꾸 보리밥을 먹겠다고 우긴다. 동생에게 쌀밥을 먹이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쌀밥을 먹여야 하는데 동생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동생은 매일같이 보리밥만 먹다가 갑자기 쌀밥을 내놓으니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둘이서 옥신각신 하다가 동생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동생은 쌀밥을

안 먹으려고 울고 나는 쌀밥을 먹이려고 울었다. 결국 동생은 그날 점심으로 보리밥을 먹었다.

  

   저녁때가 되어서 엄마가 돌아오셨다. 동생의 동태를 살피더니 쌀밥을 먹였느냐고 물었다. 지레 겁을 먹고 설움에 북받쳐서 울었다. 엄마가 왜 우냐고 물었다.

킁킁거리면서 동생이 쌀밥을 안 먹으려고 해서 못 먹였다고 했더니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서러워서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두 끼는 보리밥 먹고 저녁은 국수로 끼니를 때우던 그때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은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보리밥을 먹지만 그때는 건강을 생각해

서 쌀밥도 먹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건강식만 먹던 그때는 모두 삐쩍 곯아서 영양실조 걸리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건강에 안 좋다는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영양이 넘쳐서 야단법석이다.

 

   보리밥이 쌀밥보다 영양이 더 많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눈치 없이 삐져나오는 뱃살을 미련 없이 듬뿍 덜어내고 싶으면 쌀밥보다는 보리밥이 제격이다.

 

  기름진 음식만이 건강에 능사가 아니듯, 우리의 삶에서도 돈과 욕심만으로는 행복을 양껏 채울 수 없으리라. 찰진 쌀밥을 양껏 배불리 먹기 보다는 성성한 보

리밥이라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배려를 익혀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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