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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11. 아!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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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길 곳이 아니었다.

 

그가 옷고름을 풀고 먼저 품기 전에는 서툰 사랑을 상상하지 마라. 행여 외로운 마음에 섣부른 몸짓으로 사랑을 구하려 했다가는 치도곤을 당하기 십상이다.

 

새벽 3시 30분에 성삼재를 출발하여 노고단으로 오른다. 깜깜한 새벽에 손전등 불빛으로 첫 만남의 설렘을 맞는다. 어제저녁에 출발하여 버스에서 잠을 청했으나 제대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잠이 설익어서 몸이 노곤하고 피곤이 묻어 있지만, 지리산이 뿜어내는 활기찬 기운을 흡입하면서 뻑뻑하게 몸속을 굴러다니던 피의 흐름도 차츰 부드러워졌다.

 

노고단에서 능선을 따라 삼도봉을 향해 가는 길에 여명이 밝아왔다. 일출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 꺼풀씩 벗겨지는 그 웅장함이 신비스럽다. 안개구름을 가득 품어 안고 쪼끔씩 내어 보이는 능선의 실루엣은 나를 흥분시킨다. 천상의 여인이 비칠 듯한 천으로 몸을 가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팔을 궤이고 세상을 관조한다. 그 위엄에 가위눌려서 감히 내가 당신을 품으려고 왔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위엄에 가위눌려서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삼도봉, 토끼봉, 칠선봉을 지나 세석산장까지 이어지는 산행은 임을 만나러 가는 주단길이 아니었다. 혈기 충천하여 멋없이 껄떡대는 머슴 같은 사내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만들어 놓은 길이다. 능선을 따라 10여 개의 고산준봉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지칠 때까지 걸어야 한다. 입에는 단내가 나고 하늘은 노랗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는다.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나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다네.’

  ‘힘이 너무 들어요.’

  ‘그럼 자네는 돌아가게.’

 

혼자 독백처럼 곱씹으며 무리한 종주 산행을 후회도 해 보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다. 그는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금강산이나 설악산과는 다르다. 세상이 뭐라 하던 상관 않고 하늘을 이불 삼아 무덤덤하게 턱 엎디어 있다. 천지를 뒤흔드는 개벽이 일어나도 꿈적도 않을 것 같은 자태가 절로 믿음이 간다.

 

산을 좀 헤아린다는 이들은 이런 지리산을 남성다운 상징을 제대로 품은 산이라고 말한다. 지리산을 가슴에 품고 꺾이는 호흡으로 체취를 느끼면서 땀에 푹 절여질 때쯤이면, 남성적인 힘이 온몸을 싸안는 다. 사내대장부 같은 믿음직스러운 힘이 느껴지니까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나는 좀 다르다. 지리산은 어머니 품과 같이 넓어서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언제, 어느 때, 누가와도 밀쳐내지 않는다. 그래서 멋모르고 우쭐대는 아들을 품어 안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세상 풍파에 지친 자들이 품에 안기면 지혜를 내어주는 그런 산이다. 

 

  세석평전에서 잠깐 허기를 달랬다.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길은 험준하다. 이미 육체적 피로점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새벽부터 9시간을 걸었으니 더 이상 걸음을 떼어놓을 명분과 힘이 모자란다. 촛대봉 쪽을 올려다보니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계단길이 버티고 있다. 세석평전에서 발길을 돌려 길상암 쪽으로 하산을 생각하며 잠시 갈등했다.

 

무리한 산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천왕봉행을 강행한다. 이제부터는 정신력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지친 몸이야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추스르면 되지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아우를 수 있는 지혜가 고갈되면 내 육신의 존재는 생존의 의미를 상실한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정신적인 지혜를 소중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장터목산장에서 목을 축이며 몸단장을 살피고 정상을 향한 가파른 등산길에 오른다. 유월의 햇빛이 날카롭다. 햇볕을 가리려고 썼던 모자에는 하얗게 소금기가 서려있다.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후회반 희망반이다. 수백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쓰러진 고사목 군락이 여기저기에서 지친 인사를 건넨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드디어 정상. 백두에서 내려와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갈라져 내려오다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삼도의 땅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세상만사를 치마폭에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히 이어져오는, 아름다운 민족의 정기를 지키고 있는 천왕봉이여. 

 

구름 떼가 몰려다니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햇볕이 내리쬔다. 하산 길은 중산리 쪽을 택했다. 세 시간에 걸쳐서 온통 돌밭 길을 내려와야 하는 길이다. 힘든 지리산 종주를 마치며 산이 왜 나를 불렀을까를 생각한다.

 

지리산은 내가 힘들다고 달려가면 덥석 안아줄 것 같은 어머니 같은 산이지만, 그렇다고 버릇없는 아이처럼 아무 때나 칭얼거린다고 안아주지는 않는다. 당신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멀찌감치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왔건만, 아직은 지리산을 찾을 품격이 모자란다. 다시 또 그가 부를 때까지 나는 그의 부름을 기다려야 하리라.

 

[산행 일시] 2006년 6월 4일

[산행 코스] 성삼재 - 노고단 - 삼도봉 - 토끼봉 - 연하천 - 벽소령산장 - 칠선봉 - 세석산장 - 촛대봉 - 장터목산장 - 천왕봉(1,915m) - 법계사

              - 중산리(33km)

[산행 시간] 15시간(2006년 6월 4일 새벽 3시 30분 출발, 6월 4일 오후 6시 30분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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