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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번지 없는 구룡마을

by 桃溪도계 2006.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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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없는 구룡마을

  

   접시꽃, 붓꽃, 봉숭아꽃, 박꽃, 호박꽃 등, 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고운 꽃망울 속에는 그들의 희망이 소담스럽게 스며있다.

  

   그들은 외지인에 대하여 심한 낯가림과 경계심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성벽을 사이에 두고 마음과 문화의 장벽은 더 두터워져 간다.

  

   가족들이랑 구룡산 산행을 마치고 구룡마을 쪽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식 무허가 판자촌이 조밀하게 어깨를 맞대고 쟁쟁거리며 다투고 있는 그곳에는,도심을 개발할 당시 집 없는 빈민들이 이주해 와 삶의 터전을 꾸리기 시작한지 20년이 넘었다.

  

   서울시에서는 시유지라는 이유를 들어 내보내려고 갖은 협박으로 밀어붙이지만, 구룡마을 주민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오히려 단결된 힘을

과시하듯 선전적인 구호를 붙인 프랭카드가 여기저기 붙어 있고, 주민자치회에서는 똘똘 뭉칠 수 있는 갖가지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구룡마을에는 1,3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거주와 생계로 고통 받는 빈민들이 생명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안간힘으로 버텨가지만, 일부 거주자는 부동산

투기수단으로 위장전입해서 구룡마을에 적을 두고 카멜레온같이 환경이나 여론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연습에 열중이다.

  

   최고의 부와 문화의 상징인 타워펠리스와는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 행정구역에서 제외되어 공식적인 주소도 없다. 같은 시장에

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지만 40년 이상의 시간적인 공백을 두려움과 신세타

령으로 견뎌내고 있다.

  

   수도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체에서 개발한 지하수를 이용한다. 땅 밑으로 묻혀야 할 수도배관 파이프가 지붕과 담장 위로 그물망처럼 얽혀져 있어 이색

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넉넉하진 않지만 전기와 각종 통신시설이 공급된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도시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인

듯하다.

  

   휴일 오후의 풍경은 다소 생경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어른 서너 명이 원두막에서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며, 깊게 패인 주름사이로 취기

를 메운다. 그들은 이가 성성한 틈으로 흘러내리는 말을 소주잔에 담아, 세상을 원망하기도 지쳤는지 자신만 원망하며 다시 그들만의 어법으로 말을 잇는

다.

  

   간밤에 먹이를 훔치느라 밤잠을 설쳐댔을 고양이 두 마리가 지붕 위 나무그늘에 쪼그리고 낮잠에 빠져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특유의 호기심과 경계

심으로 몸을 낮춘다.

  

   길 건너 개포동아파트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둘째아이의 친구가 몹시 부끄러운 듯 자기 동생을 업고 지나가면서 얼버무리는 투로 아는 척하고는 얼

굴을 붉힌다.

 

   낮은 처마 밑으로 세간들이 잠깐 보이는 틈에, 쉰을 넘긴 아낙이 축 늘어진 속옷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연거푸 부채로 더위를 식힌다.

  

   엊그제 개업한 듯한 두 평 남짓한 만물상회에는 갖가지 만물을 늘어놓고 있다. 주인아줌마와 딸아이가 번갈아가며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멍하니

시선을 떨구고 있다가 심기를 건드리는 애꿎은 파리만 원망한다.

  

   동네 아이들 서너 명 깔깔거리는 틈에,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의 종아리에는 모기물린 자국으로 지난밤의 흔적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고, 엄마

가 집을 나간 듯한 행색이 남루한 아이의 맨발에는 그의 꿈도 짓밟혀 있는 듯해서 가슴이 아리다.

  

   동네 곳곳에 연탄 판매소와 연탄 창고가 있어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을 투시한다.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간판이 높은 철물점에는 갖가지 철물들이 조는 듯 걸려있고,   비닐하우스 같은 가게에는 과자와 음료수, 몇 가지의 과일이 진

되어있다.

  

   그러나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승용차들이 빼곡하게 주차해 있고, 곳곳에 무선 접시안테나가 하늘에 떠다니는 정보를 수신하느라 귀를 쫑긋하게 세워서

숨죽이고 있는 폼이 구룡마을과는 어색한 대조를 이룬다.

  

   산행으로 피곤한 다리도 쉬고 마음도 정리할 겸해서 가게 앞 평상에 앉아 구룡마을을 올려다본다. 낮은 지붕 위로 교회 십자가가 성벽을 뛰어넘을 꿈을

간직한 채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고, 삐뚤삐뚤하게 제멋대로 생긴 굴뚝으로 새어 나오는 하품 따라 한숨 소리가 좇아 나와 지붕 위를 맴맴

돌며 세상 눈치를 살핀다.

  

   그들이 왜 여기에서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여기를 면하지 못하는 사람, 아버지 어머니 모두 같이 살 수 없어서 할머니랑 같이 사

는 어린아이들, 아니면 할아버지 혼자서 자식과 세상을 피해 흘러들어와 사는 경우 등. 아마도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만

큼 많을 것이다.

  

   물리적인 장애물이 없는 성은 번지르르한 구레나룻을 위엄 있게 쓰다듬으며 수문장이 지키는 돌로 쌓은 튼튼한 성보다도 훨씬 더 높고 견고하다.

  

   마음의 돌로 쌓아져 있는 성은 하늘까지 잇닿아 있어서 구룡마을은 하늘과 닮아 있다. 하늘이 찌푸리면 같이 찌푸리고 하늘이 방긋 웃으면 잠시 어둠을

걷는다.

  

   구룡마을은 두터운 장벽으로 인해 쉽사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한다. 누가 구룡마을의 내일을 찾아 줄 것인가. 스스로는 자신을 찾는 노력

을 포기한 눈빛이다.

  

   시간이 무너져 버린 공간에서 꽃들은 근심 없이 하늘만 쳐다보며 생글거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따라 무거운 그림자가 칭얼거리고 가슴에 쌓이는

저린 마음은 산행의 뒷맛을 씁쓸하게 한다.

  

   지금 구룡마을 입구에는 강남구청과 공동개발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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