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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찻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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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의 추억


   텅 빈 어깨를 추스르며 찻집에 들어서면 아가씨가 껌을 찍찍거리면서 ‘어서 오세요’하고 콧소리로 반긴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불그레죽죽한 조명 아래서 처

음 본 듯한 아가씨가 요사스럽게 헤헤거리며 매달린다.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아버린 신발을 질질 끌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잔주름이 늘어버린 아가씨들의 살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인 찻집 특유의 퀴퀴한 분

위기가 자연스럽다.

  

   저녁반주로 한 잔씩 걸치고 반쯤 풀어 제친 넥타이에 취기를 달고 들르는 찻집은 차를 팔기보다는 맥주와 양주를 판다. 늦은 시간에 매일같이 찻집으로 들어

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아가씨는 그 찻집에 첫 출근한 아가씨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음 해 복학을 고려해서 학교 근방에 자취방을 얻으러 복덕방에 갔다. 복덕방 아저씨는 돋보기에 걸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방들을 소개했

다. 가난한 독학생의 눈 속으로 맘에 드는 방이 들어와 망막에 각인된다. 보증금 삼십만 원에 월 삼만 원. 복덕방 아저씨와 방을 확인하러 갔다. 찻집 현관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더니만, 문을 잡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자 부스스한 아줌마가 게슴츠레하게 귀찮은 듯 나타났다.

  

   방을 보여주는데 가격에 비해 방은 꽤 넓고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근방에서 최고 싼 방이었다. 단, 흠이 있다면 찻집 홀을 가로질러서 방에 들어가야 한다.

방문 옆에 화장실이 있고 옆방은 아가씨들이 기숙하는 방이었으며, 맨 안쪽은 주인아줌마가 기거하는 방이다. 가격이 품질을 결정하던 시절이어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선뜻 계약을 했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날부터 시작된 자취방에서의 생활은 참담 그 자체였다.  피곤에 지쳐 구겨진 몸을 펴 볼 요량으로 잠을 청하면, 내 둥지엔 술 취

한 뻐꾸기들이 취기로 세상을 메우느라 풀린 눈자위를 추스르며 흐느적거린다.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난리 브루스를 춘다.

  

   겨울이 되자 둥지의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연탄불을 피워놓고 출근을 하면 퇴근하기 전에 연탄을 한 번 갈아야 하는데, 주인아줌마가 두어 번 선심을 베풀고

는 그 이상은 몸을 아꼈다. 연탄불을 계속 피울 수 없어서 방은 냉골이 되었다. 전기장판을 깔고 술독처럼 이불속에 몸을 묻고 한겨울을 나야했다.

  

   방은 속절없이 크고 냉기는 뼛속을 후빈다. 밤마다 횡설수설하며 토해내는 노랫소리를 어머니의 자장가쯤으로 여기고 잠을 청하곤 했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면 윗목에는 광란의 밤을 움켜쥐고 화장실에 볼일 보러 왔다가 내 방문을 열고 철철 넘치게 싸고 간 흔적들이 냉랭하게 얼어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꽁꽁 얼

어서 툴툴 깨어내 치우기 편하다. 댓돌 위에 벗어놓은 구두 안에는 영역 표시하듯 토해낸 이물질이 가득 담겨서 얼어 있다. 연탄집게로 찍어서 털어내고 아무

렇지도 않은 듯 신고 다녔다.

  

   찻집의 아침은 눈보라가 지나간 새벽녘 들판처럼 휑한 정적만이 깔려있다. 아가씨들은 맥주 비린내를 풀풀 풍기며 잠 속으로 곯아 떨어져 있다. 평소에 무덤

덤한 척 선하게 굴던 나의 눈빛이 보리쌀 소쿠리 쥐 눈처럼 반짝인다. 방문 손잡이가 빠져버린 구멍 속을 빠르게 조리개질하며 아가씨들을 바쁘게 훔치느라 호

흡마저 멈칫거린다. 

  

   얼굴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화장이 담배연기처럼 뭉개져 있고, 피곤에 지친 짧은 스커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채색된 연노랑 팬티의 유혹은 지난밤의 혹독

한 냉기를 녹이듯 철없는 욕정을 끓인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며 주체할 수 없이 타 들어가는 찻집의 아침을 겨우 진정시키곤 했다.

 

   내가 잠드는 밤마다 환락에 몸부림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던 찻집은 내가 깨어나는 아침이면 입을 헤벌쭉 벌리고 아무렇게나 뒹굴며 잔다.

찻집의 아침은 고요하다 못해 철없는 고독이 천진스럽게 널브러져 있다.

  

   멍든 가슴을 지우려고 독주를 퍼붓던 아가씨들은 자유를 꿈꾸었지만 퀴퀴한 찻집의 어둠 속에서 고독한 먼지만 쌓아갔다. 현관문 틈 사이를 강렬하게 헤집

고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찻집의 고독을 깨울 때, 그들은 희미하게 비치는 희망에 기대어 일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간밤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곤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엔 찻집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심울한 고독에 지친 찻집은 아가씨들의 진한 화장품 냄새와 취기를 묻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난 속에서도 결코 꿈을 잃지 않던 청년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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