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합 실
저승은 형체가 없다. 그냥 가물 할 뿐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여 가는 저승엔 아무도 없다. 맞아주는 이도 없고, 나를 심판하는 이도 없다. 이승의 끝이 저승이었다면 인간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텐데, 저승에는 인간이든 사물이든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태초에 내가 없었듯이 저승에도 나는 있을 수 없다.
몇 일전 산보하는 기분으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편도제거, 비염비대증, 무호흡증 수술을 하기 위해서 보호자인 아내를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S병원에 입원했다. 금식 명령이 내려지고, 태어나서 한번도 허락지 않고 순결처럼 지켜오던 나의 몸을 내 주고 말았다. 내 몸에 처음으로 링거가 꽂힌 것이다. 이튿날 수술대위에 누웠다. 전신마취라는 짜릿함을 느껴보는 것도 처음이다.
수술은 계획대로 치러졌고 결과도 좋았다. 수술 이튿날 갑자기 목구멍에서 피가 나왔다. 간호사와 동행해서 이비인후과로 내려갔다. 간단히 지혈처리를 하고 병실에 올라와 가글하고 있는데, 다시 목구멍에서 피가 나와서 간호사실을 찾았더니 계속 가글하면서 기다리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해도 출혈은 더 심해져 감당할 수가 없다. 다시 간호사실을 찾아가 수습을 요청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쁜 듯한 간호사가 “가글하고 있으라니깐요” 라며 톡 쏜다. “가글로 해결될 일이 아니 예요” 라며 피 섞인 말을 억울한 듯 뱉었다.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이 턱짓으로 이비인후과로 내려가라고 지시한다.
휴지로 피를 수습하며 이비인후과로 혼자서 내려갔다. 의사 진찰결과 재수술 명령이었다. 다시 수술대위에서 마취 마스크를 섰다. 두 시간 넘게 수술이 진행 되었으며, 희미하게 의식을 회복 하였을 때 나의 위치는 저승역 대합실인 중환자실.
수술은 목구멍 출혈을 급히 지혈해야 하는 응급수술 이었는데, 수술대 위에 누워서 준비하고 지혈처리 하느라 덤벙거리고 있는 동안 출혈이 너무 많아 기도를 넘어 폐에 피가 고이면서 기도가 막혀버린 것이다. 숨이 멎어 버렸고 의사들은 당황했다.
그 순간 대합실 창을 통해 저승을 본다. 무색무취하며, 끝없이 현현玄玄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보이는 게 없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섬뜩하다. 고공비행낙하 훈련 하듯이 뛰어내리면 이승의 문턱을 넘어 저승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발적으로 떨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승사자에게 등을 떠밀려 떨어진다. 걔 중에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겁에 질려 그냥 떨어지는 이도 한 둘 있다.
저승에서는 오직 혼자만의 우주를 꾸려가야 한다. 혼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개념이다. 저승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주의 한 미립자로 영원히 저장될 뿐이다. 다시 그 기억들을 꺼내어 데이터로 활용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합실 창을 통해 본 나의 기억으로는, 저승의 더 깊은 내막을 알 수 없는 한계를 느낄 뿐이다.
의사는 기도를 통한 호흡기 삽입 시도가 실패되자 더욱 당황하였으며, 시간은 급박하게 초를 다툰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 의사는 기도를 급하게 뚫는다. 경황이 없어 세밀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대충 뚫어서 숨통을 틔우고, 대합실에서 개찰순서 기다리는 나를 새치기해서 빼내왔다.
저승역 대합실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응급실에는 대합실 대기자들로 득실거린다. 대합실내에는 유니폼을 입은 도우미들이 있고 저승사자들이 쉼 없이 순찰을 돈다. 거의 대부분은 저승사자와 눈 마주치기를 두려워한다. 나는 비교적 담담하게 저승사자 일 거수 일 투족을 살필 수 있었다.
도우미들은 하루 3교대 근무로 철저하게 프로직업근성을 가진 집단이다. 그들은 대합실 손님들에게 아주 친절하지만 절대로 정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저승으로 떠난 친구의 뒷자리 수습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손발 척척 맞혀가며 웃으면서 일한다. 대합실에 새 손님이 엉기적거리고 들어오면, 저승으로 갈지, 되돌아갈지를 가려내는 번득이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저승으로 가든지, 이승으로 되돌아가든지 개의치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바쁘게 수행하는 냉정함을 가졌다.
이틀 뒤, 아무렇게나 절개해 놓은 성대 봉합수술을 하기 위해서 다시 전신마취 마스크를 섰다.
수술이 마무리 되고 대합실에서 기다린다. 교통사고, 안전사고, 폭행사고, 기타 질병 등 갖가지 이유로 대합실 한 구석을 노숙자처럼 차지하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 신음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이가 절반이다.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이다. 대합실에서 저승역 손님들과 부대끼면서 닷새를 보내는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던 저승의 모습만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새벽에 바로 옆자리에 누워있던 노숙객의 자리가 치워졌다. 그는 보따리 하나 들지 않고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저항 없이 따라갔다. 그날 나는 그와는 반대로 대합실을 나와 일반병실에서 몇 일간 회복을 하고 퇴원을 한다.
입원할 때 보다 보따리가 크고 숫자가 많이 늘어, 다 짊어지고 가기에는 무겁다. 보따리를 풀어 어떤 걸 가리고 누구를 줄까. 보따리가 어깨를 짓누른다. 빨리 벗어 버리고 싶다. 무거운 보따리야 냅다 던져버리면 되겠지만, 던진다고 보따리 속에 들어있던 진실마저 사라질까.
차라리 보자기가 헤질 때까지 짊어지고 다니면서 숙명처럼 나를 기억하는 정표로 삼아야겠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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