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행 막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니며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만용 같은 자신감이 더 많던 시절, 얼굴에는 아직 여드름 찌꺼기도 채 가시
지 않은 애송이들이 술잔에 시간이 녹아드는 줄도 모르고 맥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만 버스시간을 놓쳤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남부정류장에 도착하여 겨우 청도행 막차를 타고 맨 뒷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피곤이 술기운에 범벅이 되어 눈꺼풀이 게슴츠레
해진다. 운전사와 안내양, 그리고 나를 포함해 손님 세 명을 태운 막차는 시내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투덜거리며 달린다. 어둠 속을 말없이 달리던 버스가 가쁜 숨
을 몰아쉬며 팔조령 초입까지 달려왔다. 큰 고개를 넘기에는 힘에 겨운지 벌벌 떤다.
덜컹거리는 버스 리듬에 맞춰 코를 골던 나는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깼다. 참으려고 잠을 청해보지만 맥주를 과하게 마신 탓에 방광이 터질 것 같다.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다. 차안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운전사는 어둠을 헤치느라 앞만 보고 달리고 안내양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줌마와 쉰을 갓 넘은 듯 한 아저씨 역시
고된 하루를 정리하느라 고개를 건들거리며 내일을 꿈꾼다.
버스가 오르막길에 지친 몸을 바짝 붙이고 덜덜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을 때쯤이다. 오줌보를 틀어쥐고 식은땀을 흘리며 참고 있었던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
어서 맨 뒤 좌석에서 두어 칸 앞자리로 옮겨 멋모르고 졸고 있는 아저씨 바로 뒤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차 안을 휙 둘러보고는 능청스럽게 아저씨가 앉아있는 좌
석의 등받이에 대고 소리 나지 않게 일을 보았다. 평온을 찾아가는 얼굴이 차창에 선명하게 비친다. 세상에서 가장 깔끔하고 시원한 뒷마무리를 마치고 뒷좌석으
로 되돌아와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버스가 정상에 오를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팔조령 정상을 넘으면서 뒤로 몰렸던 오줌이 앞으로 흘러내린다. 버스가 좌우로 흔들리면 추상화를 그리듯 이
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안내양이 앉아있는 좌석을 넘어 운전사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흘러갔다. 드디어 졸음에 지쳐있던 안내양이 눈치를 챘다.
"어머나, 기사 아저씨 누가 오줌 쌌나 봐요.”
귀가 번쩍 뜨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조이며 실눈을 뜨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고 안내양은 뒤를 돌아보며 씩씩
거리다가 반응이 없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밀대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안내양은 아저씨를 의심하는 눈치다. 그렇지만 아버지 같은 아저씨가 피곤하게 차창에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마음을 누그러뜨린 듯 했다. 더 심
하게 추궁하지 않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내가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고 텅 빈 버스는 말없이 종착역을 향해 떠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달빛을 지고 어슴푸
레한 밤길을 걸으며 잠시 인생을 생각했다.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절박함이 빚은 그때, 내가 탄 버스가 막차가 아니었다면 내게 그럴 용기, 아니
만용이 있었을까.
아내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핀잔을 준다. 기사 아저씨한테 차 좀 세워 달라 해서 편하게 소변보면 될 것을 바보처럼 차에다 오줌을 쌌다고 놀리기
까지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염치로는 차에다 오줌 싸는 게 더 용기 있는 일이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막차
라는 강박관념이 버스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막차를 탄다면 이젠 깜깜한 밤중이라도 개의치 않고 버스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의 용기와 지금의 용기와는 결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세
월을 쌓아오면서 세상에 대한 내 감정이 그만큼 더 무뎌졌기 때문이리라.
내가 길 위에 있을 때에는 차가 떠나 버릴까봐 함부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며 두려움으로 살아가지만, 지나온 길은 내가 호흡을 조절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음을 후회하곤 한다.
인생은 막차를 탄 여행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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