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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천년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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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만나기로 했다. 조바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역사시간에 졸린 눈으로 흘리듯 잠깐 만난 이후로 그는 나의 짝사랑이었다. 당신을 사랑해 버린 나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다.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못하고 가슴에만 품었던 지극히 소심한 사랑이었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당신을 뵙고 싶은 마음을 앞세우고 한 호흡에 돌계단을 올랐다. 불이문不二門에 이르러 숨을 몰아쉬며 잠시 매무새를 다독인다. 선뜻  나아갈 수가 없다. 혼자만 숨겨왔던 첫사랑을 만나는 두근거림이다.

 

둥지 앞 축대 밑에서 또다시 멈칫거린다. 많이 보고 싶었는데, 막상 당신 앞에 서니까 다가 설 용기가 없다. 그동안 흠모해 온 당신이 행여 실망할까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이렇게 만난다는 게 두려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품어왔던 사랑이었기에 꼭 안아주고 싶었다. 

 

마음을 저미며 당신 앞에 섰다. 잠시 외출했을까. 당신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가녀린 햇살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잠시 혼절한 기분으로 하늘을 본다. 쪽지를 전해주었던 그 자리에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던 까닭은 아마 당신도 나를 만나기가 두려웠던 까닭일까.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렸을까. 그가  어설프고 겸연쩍은 웃음으로 나를 반긴다. 호들갑 떨지도 않거니와 어제 만났던 친구를 만나는 듯 그냥 그러려니 웃는다. 푸근한 정을 속없이 내어 놓는 아줌마 같은 미소가 나는 좋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듯 무겁다. 친근하게 품어줄 듯하지만 쉽게 다가설 수는 없다. 그의 앞에 서면 아무 데서나 잘난 척하던 천한 품성이 몽땅 들켜버린 느낌이 들어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멈출 듯 이어지는 미소에 잠시 나 자신을 잊는다. 차츰 그의 입가에 내 영혼이 걸린다. 그는 백제인의 미소를 천년 동안 이어왔지만 한 번도 그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지칠 줄 모르는 천상의 웃음이다. 그는 딱딱한 돌로 빚었지만 신의 성품을 곱게 담아낸 천상의 미소를 머금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앞에 서면 성난 도깨비도 잠시 찡그린 얼굴을 거두고 미소를 그려낼 수밖에 없는 마력을 느낀다. 내 가슴에 고운 사랑을 선물해 준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도 그의 미소는 지워지지가 않는다. 잊으려 할수록 더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떠오른다.

 

꼭 한 번 그의 미소를 닮고 싶다. 그 순간 나는 삶이 왜 고통스러운지,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또다시 천년, 아니 만 년을 이어가면서 천진한 웃음으로 세상 모든 아픔을 보듬어줄 것이다. 

 

염화미소.

당신에게서 얻은 나의 미소가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비출 수 있으면 좋겠다.

 

수필집 [파고만댕이의 여름] - 중에서

 

서산 마애삼존불(다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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