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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막둥이의 하루

by 桃溪도계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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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노루귀(2016년 풍도)

 

중학교에 입학한 막둥이 녀석이 외모에 꽤 신경을 쓴다. 여학생들이랑 같은 반에서 공부하다 보니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뒹굴며 살아온 그에게는 새로운 일상이다.

 

더운 여름날 웬만하면 그냥 자면 좋겠지만, 자신에게 선심 쓰듯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는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기 바쁘게 거울을 본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삐죽삐죽 뒤엉켜서 마음에 내키지 않아 속상한 모양이다. 머리를 감으면 될 텐데 귀찮은지, 잠 덜 깬 얼굴에 짜증을 덕지덕지 붙여서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성이다가 물을 바르고 빗으로 빗는다.

 

그러나 세상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머리카락들이 시위하듯 총총히 일어선다.

 

한 발짝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막둥이가 쉽게 승복할 수가 없다. 그날 저녁에도 샤워를 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미 소가 긴 혓바닥으로 핥은 듯이 뒤엉켜 있다. 이놈들을 어떻게 길들일까 고민하다가 쳉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밥도 모자를 쓴 채 먹는다. 시간이 좀 지났으니 제법 숨 죽었으려니 하고 모자를 벗어보니 약 올리듯 꼿꼿이 일어선다.

 

또다시 그날 저녁에 샤워를 하고 이제는 잠자기 전에 아주 쳉 모자를 쓰고 잔다. 이튿날 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거울을 본다. 모자를 눌러쓴 자국에 머리카락에 띠를 두르고 시위를 하며 부아를 지른다.

 

한 발 물러서서 고민 고민 하다가 그날 저녁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쿨쿨 잔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들이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기분이 괜찮다. 그런데 저녁에 샤워만 하고 머리를 감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영 마땅치 않은 표정이다.

 

내가 중학교 때에는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으므로, 무거운 모직 모자를 눌러쓰고 나였어도 머리카락 때문에 고민할 일은 없었다. 설령, 머리카락이 길어서 삐죽삐죽 일어섰더라도 막둥이처럼 사치스러운 고민을 할 여유가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 일 도와드리고 아침밥을 먹을 여가도 없이 허겁지겁 가방 챙기고 대문을 나서기 바빴으므로 용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리카락과 날 선 씨름을 벌이고 있는 막둥이에게 머리를 빡빡 깎으라고 권해보았지만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든다. 막둥이의 거울 속에는 오늘도 잘난 고집을 꺾어서 의기양양해진 머리카락이 건들거리며 하루를 연다.

 

- 수필집 마고만댕이의 여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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