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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어느 이방인 아내의 고백

by 桃溪도계 2023.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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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 만 리에 정을 묻고 사랑을 심고 싶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의 가시 같은 슬픔을 뒤로하고 그녀는 고국을 떠나왔다.

 

어차피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사랑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절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굳이 많은 돈이 필요했던 건 아니겠지만, 가족들의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정도의 돈과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돈이면 되었다.

 

아직은 철부지라면 철부지다. 부모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한 나이인데, 새로운 삶을 찾아 보모 곁을 떠나왔다. 이 모든 아픔을 다 치료하고도 남을 만큼 꿈은 야무지게 커져, 더 이상 품을 비집고 들어올 불행은 없다.

 

십 대 일의 경쟁을 자랑스럽게 통과했다. 사랑할 대상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친구들 간의 경쟁으로 꿈이 깨질까 봐 조바심을 내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두려움도 없었다. 상대방이 그에게 내어줄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닥치는 모든 아픔은 자신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원했던 사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어리둥절하게 맺어진 남편의 손을 놓칠세라 굳은 맹세를 다지며 꿈을 실은 사랑의 비행기에 올랐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서울에서 그의 사랑을 심으면 된다. 친한 친구는 가평의 한 시골에서 농사짓는 나이 많은 신랑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에 비하면 그는 과분하게도 서울 강남에 있는 번듯한 빌라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다만 시부모와 동거하는 결혼생활이 조금은 불만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시간들이 조마조마하게 흘러갔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기대감이 차츰 자신을 옥죄는 사슬로 둔갑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시부모님들의 눈치가 영 이상하다. 물론 남편의 행동거지도 불안하다.

 

가평 친구 결혼식에 바람도 쏘일 겸 가고 싶었지만, 시아버님께서 데려다주지 않아 갈 수가 없다. 처음으로 인륜의 장벽을 느꼈다. 사랑을 심고 싹을 틔울 토양이 너무나 척박하다. 튼실한 사랑의 씨앗으로 아무리 거친 땅에 심어도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땅껍질의 두께가 무겁게 느껴진다. 작은 두려움들이 포말처럼 이는 틈으로 향수와 설움이 북받쳐 가슴이 쪼그라든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의 생각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밤에는 유난히 달빛이 서럽다.

 

남편은 아직 젊지만 사회적으로 적응력이 다소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해 반해 그는 야무지고 친화력이 좋다. 결혼에 대한 정체성을 아직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소녀 같은 아낙이지만, 낯설고 물 선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는 초겨울 칼바람에도 고집을 꺽지 않는 억새 같이 꼿꼿하다.

 

그의 시어머니가 그의 손을 꼭 잡고 하루에 한두 번 시장에 나올 때 서울을 경험한다. 그에게 보이는 서울은 웬만한 동네 뒷골목보다도 작다. 주변 사람들이 며느리에 대한 궁금증을 시어머니 눈초리에다 꼬치꼬치 매달면 시어머니는 긴장한다. 며느리를 낚아채갈까 봐 주변의 시선을 경계한다. 자식을 장가보냈지만, 며느리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않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아이를 가졌다. 연신 싱글벙글하며 주변에 자랑도 늘어놓는다. 한 편으로는 며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사실, 시어머니는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면서도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무시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옷 한 벌이면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계절을 날 수 있는 검소한 생활력과 절약만으로 세상을 이어간다. 며느리가 아이를 가진 기쁨으로 시장에서 바나나를 장바구니에 담아 오는 날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인심이다.

 

시어머니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 3개월째 쯤 되어서 유산이 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좌절이다. 그는 끝내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시어머니께 떼를 썼다. 돈도 사랑도 싫다. 그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감옥 같은 공간을 단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하여 선택한 길이 아니라고 자위해 보지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은 그의 의도대로 선택되는 그런 지푸라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사랑에 목마른 사막의 낙타가 되어갔다. 명분으로 걸고 왔던 모든 것들이 퇴색되어 지쳐간다. 사랑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는데, 이젠 그 사랑이 두렵다.

 

두려운 사랑 속에서 다시 임신을 했다. 아이가 뱃속에서 철 모르게 자란다.  시어머니는 다시 며느리에 대한 눈먼 사랑을 키워가고, 그럴수록 그는 사랑에 대한 꿈이 희미해져 간다. 자신의 사랑이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랑을 위한 그의 다짐이 지쳐갈 무렵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도 그는 서글프다. 덤으로 얻으려 했던 사랑. 그는 사랑을 심고 싶었지만 쉽게 싹이 트지 않음을 가슴으로 삭인다. 시어머니에게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랑 같은 건 사치이기 때문이다. 오직 튼실한 열매만 좋아한다. 

 

그는 아이의 눈 속으로 비치는 달빛을 따라 고향의 안부를 묻는다.

 

- 파고맨댕이의 여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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