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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설악산 공룡능선

by 桃溪도계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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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을 만나기 위해 오색약수터의 새벽을 열어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대청봉에서 일출을 맞았다. 대청봉 정상석에는 인증숏을 찍기 위해 늘어선 줄이 제법 길었다.  일행 중에 대청봉 정상을 첫 상봉하는 친구가 있어서 우리도 인증숏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내 바로 뒤에는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남녀 친구가 둘 있었다. 그 뒤로 우리 일행들이 서 있었다. 나는 대수롭잖게 친구들에게 내 앞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뒤에 섰던 젊은 남자가 대뜸 목소리를 돋워 당신이 뒤로 오면 되지, 왜 친구들을 앞으로 오라고 하느냐고 성을 낸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만한 일에 큰 산에 올라서 아침부터 성을 내느냐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그가 늙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는 투로 목소리에 비아냥이 묻어있다. 순간 가슴이 바짝 오그라 들고 이성을 잃을뻔했다. 그냥 좋은 말로 하면 되지 이만한 일에 성을 낼 일이냐며 시비가 되자 친구들이 말렸다. 나도 큰 산에 와서 이런 일로 시비가 붙는 게 싫어서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내 앞으로 오라고 양보했다. 그랬더니 고맙다는 말도 없이 앞으로 나선다.
 
못난 놈이다. 친구들이 그들을 질러 내 앞으로 이동하는 행위를 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내가 말만 했을 뿐인데, 그렇게 성을 내며 목소리를 돋우고 비아냥대는 것은 나를 약자로 본 것이다. 그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기회주의적인 얍삽한 놈이 분명하다. 아들뻘인 그에게 시비를 걸어야 본전도 못 찾게 생겨서 더 이상 시비를 포기했지만 산행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늙은 사람이라고 비아냥 거릴 때, 늙은 사람의 본 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 산에서는 그에게 뒤질 마음이 없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합류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알 텐데도 옹졸하게 성을 내는 그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늙은 사람이 친구들과 함께 사진 좀 찍겠다는데, 조그만 양보에 인색한 젊은 놈이 그렇게 좁은 아량으로 산은 왜 왔는지. 늙은 사람에게 떼쓰서 양보받으니 기분 좋으냐. 
 
인간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데...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겠다.
 
2023년 10월 2일.
 
 
[공룡 꼬리를 밟다]
 
스쳐가는 일상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있으랴. 내 삶의 길에서 잠시 한 토막 짬을 내어 시간을 삼켜버린 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꿈에서나 만날 법한 경이로운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늘 마음에 두고 짝사랑했던 공룡을 만나러 대청봉으로 오르는 새벽길엔 철 이른 가을비가 내려서 산인들의 마음을 흔들지만 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호흡을 몰아세운다. 산 중허리에 올랐을까. 여명이 새벽을 깨우며 대지의 어둠을 걷는다. 산을 한 움큼 잡고 난 뒤 돌아보는 시야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막연하게 기대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설악산 운해다. 그 순간 산에 오르기 전에 잠시 가졌던 염려가 한꺼번에 싹 가신다.
 
산행 길 좌우로 투구꽃들이 도열하며 힘든 우리들을 따뜻한 향기로 맞아준다. 그들은 우리가 산에 오르는 줄 어찌 알았을까. 새벽부터 투구를 쓰고 전투차림을 갖추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꼿꼿하게 서서 범치 못할 위용을 뽐내고 있다. 
 
가쁜 호흡이 설악의 넓고 깊은 기운과 소통될 즈음 대청봉 정상에 섰다. 대청봉은 오를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대청봉은 하늘과 닿아있어 더 이상의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하얀 구름이 천불동 계곡과 멀리 울산바위를 에워싸듯 바삐 움직이면서 아름다운 의식을 준비하는가 보다. 속세에 살면서 갖가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 우리들이 그를 볼까 봐 서둘러 감춘다.
 
내 몸속에 담겨있던 헛된 욕망과 못난 심통을 땀으로 쏟아내고 나니 한결 후련하다. 몸보다는 마음이 먼저 가벼워진 느낌이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늘 비우기를 원하면서도 비워지면 또 채워야 하는 근성을 어찌 탓하랴. 어쩌면 그것이 본래의 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중청산장에 들러 마음이 비워진 가슴에 아침끼니를 채운다. 
 
산장 귀퉁이 골바람에 맞선 바람개비 같은 작은 풍차 한 대가 숨 가쁘게 돌아간다. 나도 가끔은 저렇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싶다. 세상눈치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돌아가다 보면 바람개비가 그려내는 완전한 동그라미에서 그토록 찾고자 했던 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군데군데 단풍이 든다. 한 해를 열심히 살았던 나무가 이제는 또 다른 무대를 위하여 장막을 걷으려고 준비 중이다. 다른 나무보다 더 빨리 단풍이 든 나무는 몸이 아팠을까.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내 가슴의 그 무엇과 많이도 닮아있는 듯해서 가슴이 뭉클하다.
 
지난 장마에 무심히 쓰러진 나무들도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욕심껏 키를 키우지 않았으면 넘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뭣 하러 욕심을 부렸을까. 쓰러지는 줄 알면서도 양껏 물을 빨아올리고 햇볕을 잡아서 챙겼겠지. 나 역시나 한 숟갈의 밥과, 한 푼의 돈에 양심을 구겼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희운각 대피소를 거쳐 신선대에서 한숨을 돌리고 천하절경 공룡능선을 맞는다. 공룡능선에 서면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 순간 아무리 가슴을 뒤져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룡은 변함없이 기개가 넘치고 감개무량하다. 당신의 달콤한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능선을 넘으리라. 
 
좌측으로는 용아장성이 뻗어있어 가운을 북돋우고, 우측으로는 울반바위의 위용이 산행으로 지친 나에게 편안한 여유를 내려준다. 천불동의 협곡들도 한껏 기운을 보탠다. 감동으로 가득 찬 가슴을 보듬어 안고 조심하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1275봉 앞에 섰다. 새벽에 산행을 시작해서 대청, 중청, 소청, 신선대를 거쳐 공룡능선에 올라서 서너 개의 봉우리를 넘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 틈으로 구름을 이고 있는 귀때기청봉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대청, 중청, 소청과 뚝 떨어져 혼자서 삐진 듯이 우뚝 쏟아있다. 그 옛날, 혼자 우뚝 솟아 있어서 저 잘난 맛에 자기도 청봉이라고 우기다가 귀때기 맞았다고 귀대기청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도 억울한데 귀때기까지 맞았으니 서러울밖에. 그렇지만 소청 옆에 붙어 있었으면 존재감마저 상실되었을 텐데, 혼자 우뚝 솟아 있으니 가끔은 다른 이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어서 자랑이다.
 
나한봉이 손을 모으고 멀리 귀때기 청봉을 바라보고 있다. 산인들의 안녕을 기도하고 있나 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 1275봉을 넘었는데, 또다시 힘을 모아 나한봉에 합장해야 한다. 저 험한 고개를 어떻게 넘나, 그래도 한 발 한 발 옮기다 보면 길은 어느새 줄어든다. 그것이 삶이다.
 
산행을 이어가다가 뒤돌아보는 맛도 일품이다. 다시 저 산으로 돌아가라면 돌아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려서 살 수 있다면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10년만 젊었으면, 5년만 젊었으면 내가 걸어온 길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리라 생각하며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후회하기도 한다. 
 
공룡능선을 넘어오면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너무 좋다. 이제 두세 개의 봉우리만 더 넘으면 능선의 장도를 마무리하고 하산 길에 이른다. 그러던 짬에 구름이 몰려오고 천동이 친다. 심술을 부리는 폼이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겠다. 설악산은 천의 얼굴이다. 새벽에는 비가 내리다가 대청봉에 오를 즈음에 하늘이 열리면서 운해로 뒤덮였다가 희운각으로 가는 길에 운해마저 지워지고 파란 하늘이 지친 가슴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기도 했는데, 이제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온다. 거부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순응해야 한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고 난 뒤 다시 파란 하늘이 열린다. 내가 지금 힘든 것은 다음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자양분을 채우는 과정이다. 힘들 때는 행복한 웃음을 기억하고, 행복할 때는 힘들 때를 생각하며 지나친 웃음을 경계해야 한다.
 
마등령에서 오세암을 거쳐 영시암에 이르는 길이 지루하다. 그만큼 많이 지친 탓이다. 뚜벅뚜벅 길을 내려오면서 줄어들지 않는 길에 짜증을 내보기도 하지만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은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줄 수도 없는, 오직 내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파고만댕이의 여름 중에서 - 2007년 10월 
 
 
[산행 일시] 2023년 10월 2일
[산행 경로] 오색약수터 - 대청봉 - 희운각대피소 - 공룡능선 - 마등령 - 비선대 - 설악산 소공원(19.5km)
[산행 기산] 12시간 50분
 

신선대
중청봉
공룡능선
범봉
울산바위
1275봉
산오이풀
구절초
쑥부쟁이
울산바위
대청, 중청
천불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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