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고추와 등록금

by 桃溪도계 2023. 9. 21.
반응형

 
 


담임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을 때마다 내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서러운 마음에 학교를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설움만 더해 갈 뿐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의 꿈은 머슴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도 몰랐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막연하게 자식의 미래를 설계하신 듯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꼴머슴부터 시작해서 큰 머슴 되고, 알뜰살뜰 새경을 모아 논도 사고, 장가들어 아들 딸 낳아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겠거니 생각하셨다.
 
6학년 초 봄이었다. 아직 한기가 성성하던 보리밭에서 열심히 밭을 매던 어머니는 이웃에서 밭을 매고 있던 친구 엄마와 아들의 진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맥없이 밭둑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집 아이들은 다 보낸다는 중학교를 맘 놓고 보낼 수 없음이 한스러워 잠시 넋이 빠진 것이다. 그리고 해거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괭이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저녁 부모님은 밤새 잠을 설치며 아들의 중학교 진학문제로 고민을 하셨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결혼해서 아이 낳아 키우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너도 나도 진학한다는 중학교에 아들을 보내지 못한다니..., 그러다가 새벽녘에 아버지는 중대결심을 하셨다. 중학교를 보내서 공부시키다가 힘들면 그때 가서 퇴학을 하더라도 일단 진학은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다지신 것이다.
 
이듬해 봄, 3년 동안 입을 수 있는 큼직한 교복을 엉성하게 줄여 입고, 머리에 푹 들어가는 꿈 많은 모자를 쓰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자식이 중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어머니의 행복감은 잠시 어머니 곁에서 기웃거렸을 뿐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등록금을 독촉하실 때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걸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어머니께 등록금 달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겨우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다음 장날 고추를 팔아서 주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시골학교 사정상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더 잘 아신다.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5일장 틈 사이에 고추를 따서 말려야 팔 수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고추 수확량이 많지 않으면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다. 약속은 사람이 하지만 자연은 호락호락하게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며칠간 지켜보시다가 불러낸다. 왜 약속한 날짜까지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았는지 채근하시면서 약속을 어겼다고 매을 들고 손바닥을 때린다. 돈이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일찍 깨달은 셈이다.
 
그 이후로도 등록금 납부 때마다 매번 약속을 어기는 나는, 소화할 수 없는 매를 맞으며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종종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다짐하고 서무실에 들러서 사정을 했다. 학생이 등록금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켜켜이 쌓아가던 학창 시절이었다.
 
아이들 셋, 등록금 고지서를 앞 다투듯 내놓는다. 등록금 고지서를 볼 때마다 나는 고추를 떠올린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장날에 고추를 팔아서 등록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제발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어디 그뿐인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나는 종종 하교 길에 소나기를 만나서 허겁지겁 달려와 마당에 말리던 고추를 포대기에 담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그렇게 맵던 고추가 하나도 맵지 않다.
 
- 파고만댕이의 여름 중에서 -

728x90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물머리의 아침  (13) 2023.10.19
설악산 공룡능선  (30) 2023.10.04
신화神話  (13) 2023.09.08
녹슨 우정  (24) 2023.08.11
나비와 애벌레  (21) 2023.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