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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두물머리의 아침

by 桃溪도계 202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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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부스스 잠에서 깨었지만, 어젯밤의 뇌성을 다 지우지 못한 듯 혼미하게 흔들리는 틈을 타서 두물머리로 향했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훌쩍 떠나는 길에, 성난 바람이 제 성질을 다 재우지 못했나 보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인연을 끊으려는 듯 광풍이 매몰차게 내리 꽂힌다.

 

거리의 가로수를 마구 흔들어댄다. 낙엽이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감기며 거리를 헤맨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을 바람은 내가 두물머리로 떠나는 이유를 알까.

 

입구에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서로 맞붙어서 터널을 만들었다. 지난여름의 모진 풍상도 고스란히 몸을 보존했던 은행잎이 떠나는 가을에게 시위하듯 샛노랗게 하늘에 걸려있다. 소녀의 감성을 다 지우지 못한 한 여인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가로수 터널을 걸어 들어간다. 터널 저 끝에서 물안개가 안부를 물으며 도란도란 마중 나온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이 만나서 한강을 이루는 이곳에는 시와 사랑이 꿈꾸고 있다. 말없이 출렁이는 은비늘 물결에 가슴은 촉촉하게 젖어들고, 가을 아침의 두물머리에는 아련하게 숨겨 두었던 유년의 기억들이 소곤거린다.

 

가을 남자는 두물머리에서 강물에 시선을 던지며 시름에 지쳐 힘겹게 굴러가는 현실을 걱정한다. 미래의 세상에 자신을 담을 수밖에 없다면, 내일의 바구니는 좀 더 촘촘하였으면 좋으련만, 질투심 많은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할까.

 

연잎도 그냥 떠나는 계절에 몸을 맡겼다. 탈색이 되고 몸이 비틀어져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진흙 속에서 겨우내 더 멋진 봄을 기다리고 있을게다. 

 

길, 내가 지나왔던 길.

내가 걸어가야 할 길.

 

지나왔던 길이 순조롭거나 평탄하지 않았던 만큼, 걸어가야 할 길도 장애물이 없고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새 잎을 준비했지만 고꾸라지는 길을 걷다가 다시 새 잎을 준비하는 연잎처럼, 그냥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숙명처럼 걸어갈 수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두물머리 돛배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홀로 외롭다. 강물이 줄어들면 그냥 그대로 따라 내려가고, 강물이 불으면 그런대로 묵묵하게 떠오른다,. 때때로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빙빙 돌기도 하며, 돛배로 태어났으니 불평 없이 물 위에 떠있을 뿐이다.

 

두물머리의 연잎처럼 돛배처럼 무심한 깨달음을 강물 가득 물안개로 피워내고 싶다.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가지지 않음을 자연스러운 행복으로 알고 저 연잎처럼 돛배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 파고만댕이의 여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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