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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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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마와 폭우를 견뎌낸 성벽은 8월의 강렬한 태양빛에 아물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놓고 아픔을 달랜다. 한강과 더불어 삼국시대 때부터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던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처음으로 축조되어 굴곡의 역사를 이어오다가 조선 인조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항상 역사의 중심에서 철옹성 같은 든든함으로 서 있기도 했지만, 때로는 굴욕의 현장이기도 했다.

 

남문에 올라서면 성남시가 발아래다. 쭈뼛쭈뼛 키 재기하듯 다투던 아파트들이 산성을 지키는 장수의 헛기침 소리를 엿듣는다. 남문 밖으로 버티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성문을 드나드는 역사의 흔적들을 나뭇잎마다 빼곡하게 적어, 지친 나그네의 시비를 가린다. 이 문을 지나는 나는 어느 나뭇잎에 내 흔적을 새겼다가 언제 누구에게 전해줄까.

 

동문까지 이르는 길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자랑삼아 껴안은 성벽이 관조하듯 엎디어 있다. 상단 이마에 땀수건을 두른 듯, 산성이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간신히 연결되어 있고,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사이로 잡풀들이 무성하게 일어나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 준다.

 

성 밖은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져 접근이 어렵고, 성 안은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는 분지로 이루어져 천하의 요새다. 지리적으로도 서울에 근접해 있어서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할 때, 동쪽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는 남한산성의 지세를 간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문으로 발길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도로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도로를 가로지르면서 산성을 일주하는 이들이 가게에 들러 막걸리를 걸쭉하게 들이키며 간장을 식힌다. 그 옛날 산성을 쌓기 위해 부역에 임했던 민초들이 피곤과 시름을 달래던 막걸리 맛이 이랬을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기분이 그만이다.

 

산성 중간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수십 개의 암문暗門 사이로 밀사들의 은밀한 눈빛이 소곤거리는 듯하다. 이 문을 통해서 성 밖의 동태를 살피러 나갔던 초병으로부터 대란을 예고하는 밀첩密諜을 접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승병이 머물렀다는 장경사에 들러 목을 축이며 놀란 가슴을 달랜다. 용트림을 하는 듯이 꿈틀거리는 산성을 따라 오르는 길은 조금 가파르지만 힘들지는 않다. 봉암성을 지나 동장대에 이르는 성벽 밖의 광주시는 푸르고 시원하다. 난중亂中에 보초를 서던 초병의 눈에도 광주는 넓고 푸른 고을이었을까. 괜한 새김질로 호흡을 다듬는다.

 

동장대에서 북문에 이르는 성벽에는 하남 쪽을 경계하며 웅장하고 견고하게 석축이 쌓아졌다. 성벽의 지붕은 두툼한 기와를 올려 꼼꼼하게 보수해 놓았는데, 지형을 따라 꾸불꾸불하게 쭉 이어진 성벽은 언제든지 적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는 듯 위용을 자랑하며 힘이 넘친다.

 

서문 밖을 나가 연주봉 옹성에 이르니 북한산의 인수봉이 지척에서 땀을 훔친다. 아직 장마의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한 한강물은 황룡이 되어 느긋하게 엎드려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동쪽과 북쪽 오랑캐들이 산성에 접근하려면 저 황룡의 철통 같은 경계를 뚫어야 가능한데, 누가 감히 황룡의 수염을 건드리겠는가. 황룡을 거느린 남한산성은 천하에 딱 한 곳이면 족하였으리라.

 

서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는 배추흰나비 애벌레 같은 골프장이 꼬물거린다. 그 뒤로 서울 시내가 병풍처럼 서 있고, 남산타워는 꼼꼼하게 하늘을 헤아린다.

 

서문에서 수어장대에 이르는 성곽 길은 평탄하게 이어져 산책하듯 걸으면 된다. 성을 쌓았던 선조들의 고통을 이해하려는지, 아니면 탐욕으로 뭉개져 버린 건강을 챙기려는 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맨발로 걷는 이들도 더러 있다.

 

수어장대에는 아직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남아있다. 물론 최근에 다시 개축하였지만, 그 옛날 이 성을 중심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수어장대에서 출발지인 남문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삶의 여정을 생각하게 한다. 흔적 없이 살다가 태어난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인생처럼 남한산성 일주는 일반적인 여행이나 산행과는 색다른 경험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괜히 우울해지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남한산성 일주를 권한다. 그냥 순찰하듯이 산성을 따라 돌면서 군데군데 해진 자리를 찾아 상처를 치료하고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비춰볼 수 있다. 

 

특별한 준비도 없이 시작했던 인생처럼, 무심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자연스레 새겨지는 미래를 품자. 남한산성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것처럼 인생의 새 출발도 특별한 구색을 갖추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수필집 [파고만댕이의 여름] 중에서

 

서문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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