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18) - 청도신문(2024년 5월 22일 게재)
중훈대부 예빈시 별좌(中訓大夫禮賓寺別坐) 현건(玄健) 선생의 추원재(追遠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이서면 수야3리 덕령(德嶺)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추원재(追遠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만송 현건(晩松 玄健) 선생으로 본관은 연주(延州)이다.
시조는 고려 대장군(大將軍)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연산군(延山君) 담윤(覃胤)이다. 고려 명종 때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아들 덕수(德秀)도 아버지를 따라 위총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병부상서(兵部尙書)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 되었다. 정헌대부우참찬(正憲大夫右參贊) 경여(敬輿),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 금(嶔), 가선대부함경도병마절도사(嘉善大夫咸鏡道兵馬節度使) 명원(明遠)이 선대이다.
고조는 승지(承旨) 광소(光紹)이며 증조는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 덕린(德麟),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선전관(宣傳官) 징(澄)이며 문과(文科) 도사(都事) 용순(用純)이 아버지다.
만송공은 1552년(명종 7) 선산(善山) 가라(嘉蘿)에서 출생하였으며 천성이 명석하고 학문을 즐겨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에 능통하여 대의를 깨닫고 문명이 높았다. 과거에 나아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중훈대부예빈시별좌(中訓大夫禮賓寺別坐)가 되었다. 아버지 별세 이후 벼슬에 뜻이 없어 청도 각북면 나부산하에 은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그 후 영천 창수(蒼水)에 옮겼다가 덕령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묘소는 각북면 나부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묘소 아래 있으며 박효수(朴孝秀)의 갈명(碣銘)이 있다.
아들 팽령(彭齡)은 진사였고 현손인 송암 태소(松庵 太素)는 문행이 있었으며 자계서원(紫溪書院) 유안(儒案)에 참록(參錄)되었으며 많은 유림들과 교유하였다. 9세손 중석(重碩)은 통정대부사헌부감찰(通政大夫司憲府監察)이며 10세손 우록(瑀錄)은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이다. 11세손 계호(桂昊)는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副使), 봉호(鳳昊)는 장릉참봉(莊陵參奉)이다.
후손 상태(相台, 동명목재 전무 역임)는 극진한 애향심으로 마을 안길 포장, 담장, 전기, 상수도 지원 및 많은 장학금을 전달하고 고향 친지를 위해 전답을 매입하여 부치게 했다. 또한 이서초등학교 및 파출소 등의 시설 정비에도 큰 힘을 썼다. 마을 입구에 공로비가 있다. 후손 기환(伎煥)은 제1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추원재는 목조와가 정면 4칸으로 1954년에 건축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했다. 성기운(成璣運)은 ‘추원재기’에 휘(諱) 건(健)은 절효 김 선생의 증손서(曾孫壻)이며 후손 우서(禹瑞), 우장(禹璋) 형제가 문필(文筆)로 한 시대에 이름이 났으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선생을 문묘에 합사하기 위해 상소할 때 동참하여 글을 썼다는 것을 밝히고 13대손 석락(碩洛)의 부탁으로 편액(扁額)과 재기(齋記)를 쓴다고 했다. 한편 13대손 승낙(升洛)도 재실 낙성에 즈음하여 축시를 마루에 걸었다.
이날 탐방할 때 후손인 상경(故, 相慶)씨 부인 하승자(河承子), 후손 상소(相素)씨가 자세히 설명하며 안내를 해주었다.
‘추원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선대의 거룩한 뜻 크고 높게 숨쉬는 곳
향불 올려 받들고 강독하며 새긴다
백세로 이어져 갈 덕령마을 추원재
- 박영환 선생의 블로그 '행전글밭'에서 퍼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