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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 散文

익숙한 것과 낯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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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가정을 이룬 지 33년이 넘었지만 심하게 다툰 기억은 없다. 가끔 가벼운 말다툼을 한 적은 있지만 대수롭잖은 일이어서 기억파일에 저장되어 있지 않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나름 살갑게 살아온 것은 아내 덕분이다. 나는 퉁명스러운 면이 많아 가끔 퉁퉁거리기도 한다. 그때마다 아내가 슬기롭게 잘 받아줘서 무탈하게 생활을 이어오고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얼마 전 설거지 하다가 그릇을 엎어두는 방식과 행주 뒤처리 하는 방식이 눈에 거슬려서 퉁퉁거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내가 짜증을 섞어 목청을 돋운다. 아내는 자신한테 왜 짜증을 내냐며 짜증을 낸 것이다. 나는 일상적인 퉁퉁 거림이었는데 아내가 평소답지 않게 민감하게 반응하여서 깜짝 놀랐다. 갑작스럽게 당한 공격이라 미처 대꾸도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니 화가 확 치밀어 오른다. 그만한 일로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어서 도로 뱉어 내려다 꾹 참았다. 

 

날씨가 더워서일까. 아니면 요즘 일이 힘에 부쳐서 감당하지 못할 스트레스 때문일까. 원인이 손에 딱 잡히는 한 두 가지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남편을 얕잡아 보는 심산일까 생각이 스며드니 좀처럼 누그러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따져볼까 곱씹어보다가도 차분히 다독였다. 시간이 한 뜸을 지나니 아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친근한 말투가 매력적인 아내로 돌아왔다. 참기를 잘했다.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하고, 낯 선 것은 익숙케하라"는 말이 있다. 최근 들어 부엌살림에 익숙지면서 나도 모르게 익숙한 것에 대해 권태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고 만만할수록 더 낯 선 시각으로 바라보고 조심성 있게 대하면 퉁퉁거릴 일이 없을 터인데 부족함을 느낀다. 아내 또한 익숙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만만하고 조심성 없는 행동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퉁퉁거렸던 것이다. 만약에 아내가 애인이었다면 익숙하지 않은 낯 섬으로 조심성 있게 대했을 게 분명하니 퉁퉁거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이란 이미 습관화되어 타성에 젖은 것을 말한다. 탐욕심이나 화를 내는 것도 습관화되어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낯설게 하라는 것은 탐욕심이 생기거든 내려놓고, 화가 생기거든 한 발 물러서서 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낯선 것이란 우리 삶에서 선한 줄 알면서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사랑이나 배려하는 마음은 좋은 줄 알지만 낯설어서 쉬 행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익숙케 하라는 것은 밥 먹듯이 습관처럼 베풀고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아내의 짜증 섞인 말투가 낯설어서 당황했지만, 나에게 익숙해져 있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한 호흡을 멈췄더니 낯 선 배려가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쌓인 아내에 대한 굳은 신뢰가 측은지심으로 발현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낯설었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익숙해지도록 곁에 두고 보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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