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하고 무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문을 열고 숨은 벽 능선에 올라선다. 바람이 간간이 불어주니 견딜만하다. 산에 오를 때마다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산에 오르는 목적을 굳이 채색하거나 따로 포장할 필요도 없이 습관이 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에너지를 방전하여 그릇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꾼들은 일상에서의 복잡 다단한 스트레스에 널브러진 잔재들을 비워내고 산에 올라 다시 채우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뒤틀리고 몸살을 앓는다. 습관처럼 산에 오르면 이유도 없이 행복한 사람들이다.
북한산 구석구석 수없이 다녔지만 아직 미답지가 있었다. 길도 방향도 모르는 계곡길이지만 노련한 산꾼들이 함께 동행하였으니 든든한 이정표가 된 것이다. 인수계곡은 장마 끝에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계곡 길이다. 아마 평소에는 수량이 부족해 무미한 산행 길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다소 가파르고 거칠다.
인수계곡의 속살을 살짝 열고 들어서니 별유천지다. 꿈에서도 만난 적이 없는 계곡에는 물이 넘치고 탄성이 절로 터진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마주하고는 주변을 살피며 치마를 슬쩍 들춰 본 느낌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계곡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위를 잊어버렸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도 웃음을 놓을 수가 없는, 비록 계곡 길이 힘들기는 하지만 계곡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진다.
화룡점정. 인수계곡과 청담계곡이 만나는 곳에 꼭지 점을 찍고 있는 청담폭포에는 원도 한도 없이 물이 쏟아져 내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진미다. 미친 듯이 뛰어들어 폭포에 몸을 맡기고는 세상 근심을 쏟아낸다. 한 여름의 더위와 짜증이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가는 이 기분을 누가 알까. 오직 나 자신 만이 세상의 진리다. 오늘부터는 좀 더 겸손하고 정의롭게 살아야겠다.
청담폭포에서 완전히 비워내고 빈 그릇을 들고 다시 청담계곡으로 오르는 길도 예사롭지는 않다. 계곡 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면 그냥 들어갈 수 없는 계곡이라 생각했을 텐데, 발을 담그고 작은 폭포들을 거슬러 오르니 산객들에게는 길이 되었다.
아름다운 영혼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안내해 준 대장님과 동료 산꾼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는 그대의, 그대는 나의 행복한 동행이다.
[산행 일시] 2024년 7월 28일
[산행 경로] 국사당 입구 - 숨은 벽 능선 - 해골바위 - 인수계곡 - 청담폭포 - 청담계곡 - 육모정고개 - 우이동(8.8km)
[산행 시간] 9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