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山 行

운문산,가지산

반응형

영남알프스를 종주했던 17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가지산과 운문산을 다시 만난다. 긴 산행 길을 버텨내며 탈진한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모아 가지산과 운문산을 올랐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영남알프스는 울주, 밀양, 청도, 양산을 아우르며 1,000미터 넘는 고산준봉들이 시위하듯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그 중심에 가지산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지산 정상에서 세상을 품어 안는 맛은 천하일미다.
 
가파른 가지산의 등로를 힘겹게 올라 잠시 호흡을 고르며 둘러보는 세상은 온 천지가 산이다. 척박한 산세를 기둥 삼아 삶을 이어왔을 조상들의 숨결이 연한 산그리매에 겹겹이 쌓여있다. 영남알프스는 설악산과 같이 웅장한 기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절경은 없다. 지리산처럼 푸근하고 넓은 품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넉넉함만 있을 뿐이다. 
 
가지산에서 운문산을 이어가는 길에서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옥쟁반에 떨어뜨리면 또르르 굴러갈 것 같은 하얀 은방울 꽃을 만나 그 반가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야생에서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데, 가끔 만난다 해도 한 두 송이 만나는 게 전부였는데, 이곳에는 군락을 이루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한참을 조우하며 회포를 풀었다. 지난밤에 재수 꿈을 꿨는지 이런 행운을 만나 연신 끙끙 앓으며 사진을 몇 컷 찍었다. 군락지가 끝날만 하면 간간이 이어지는 은방울꽃의 열렬한 환영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은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은방울꽃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는 행복이다.
 
이렇게 예쁜 꽃도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진리를 되내어 본다. 꽃은 아름다우니까 지는 것이다. 아무리 예뻐도 지워내고 비워내야만 참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다는 충고를 가슴에 새기며 운문산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아랫재까지 한 참을 내려가니 두렵다. 다시 올라야 할 산 길을 힘들게 옭아맬 생각을 하니 힘이 빠진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는 인생이니 한 발 한 발 다가갈 뿐이다. 
 
운문산 정상 오르는 길은 지리산의 노루목 삼거리에서 반야봉을 오르는 길과 너무나 닮았다. 가파른 길을 힘들게 올라서 다시 제자리로 내려와야 하는 운명도 데칼코마니다. 언제나처럼 힘든 산행을 하는 이유는 뭘까 잠시 생각해 본다. 산행은 복잡하고 스트레스 많은 삶 속에서 단순 명료해지기 위해 道를 구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운문산에는 운문산의 道가 있고, 가지산에는 가지산의 道가 있음을 새긴다. 
 
[산행 일시] 2024년 6월 1일
[산행 경로] 석남터널 - 가지산 - 아랫재 - 운문산 - 아랫재 - 얼음골 사과마을(14km)
[산행 시간] 5시간 40분
 

은방울꽃
가지산
가지산
꿀풀
기린초

728x90

'山 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계산 이수봉  (13) 2024.06.10
예봉산, 운길산  (13) 2024.06.07
지리산 종주(18)  (15) 2024.05.27
계양산  (13) 2024.05.17
지리산 서북능선  (13) 202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