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시지 마라' 했거늘 나는 견딜만하지 못하여 다시 지리의 산문을 연다. 고행길 같은 산행을 할 때마다 힘들어하면서도 때가 되면 기다려지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냥 내 삶의 길이려니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견뎌낼 뿐이다.
새벽 3시 성삼재의 바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얼씨년스럽다. 흐릿한 하늘에는 별들이 총기를 잃어 오늘 산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견한다. 가쁜 숨을 몰아 땀 한 줌 짜내며 오른 노고단의 공기도 만만치 않다. 울퉁불퉁한 밤 길을 손 전등에 의지해 걸음을 재촉한다. 산 길 30km 이상을 걸어야 하니 마음도 바빠 여유가 없었지만, 숲이 내어주는 달콤하고 신선한 공기가 위안이 된다.
삼도봉에 이를 즈음에 여명이 열린다. 행여 일출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해는 졸고 있었다. 지리의 일출은 언제든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마음을 내어 보여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행운을 얻을 뿐이다. 연하천까지 13km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간단히 김밥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벌써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데 구름에 갇힌 산행 길이 단조롭고 조망이 열리지 않으니 지루하다. 더군다나 며칠 전 내린 눈 때문에 능선 길에 있는 나뭇잎들이 냉해를 입어 고스라졌다. 안타까운 마음까지 걸치니 더 힘들다.
11시에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23km의 길을 예정대로 잘 버텨왔지만, 오늘따라 일행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 왠지 불안한 기운이 엄습한다. 촛대봉에 올라 점심 끼니를 해결하고 서둘렀다. 지리능선 중 제1 경이라는 연하선경을 지나오는 길이 즐겁지가 않다. 매 번 연하선경을 걸을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리의 행복을 마음껏 담았던 길이었는데, 조망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일행들의 얼굴빛이 어둡다. 아무래도 컨디션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분위기다. 겨우 장터목에 도착해서 한숨 돌리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제석봉 오르는 돌계단을 몇 번이나 쉬어가며 올라야 하는 컨디션 난조를 보인다. 일행들이 속도 불편하고 다리 근육도 지쳐 은근 오늘 산행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돌아갈 수 없는 길. 천왕봉을 향하여 쉬엄쉬엄 걷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힘들었지만 한 발 한 발 쌓으면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루종일 곰탕 뷰여서 산정에 올라도 조망은 보이지 않지만,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지키고 있어 든든하다.
힘든 산행이었지만 어깨를 내어주어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에 또 하나의 지문을 남기는 일은 언제나 가슴 벅찬 보람이다. 삶이 녹록지 않은 만큼 삶의 길이 막힐 때나 마음에 든든함을 담고 싶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지리의 산문을 열 것이다.
[산행 일시] 2023년 5월 25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삼도봉 - 세석산장 - 장터목 - 천왕봉 - 중산리(32.5km)
[산행 시간] 13시간 5분
山 行
지리산 종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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