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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行

지리산 서북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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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노고단과 반대 방향으로 산문에 드니,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강풍이 불어 산행의 긴장감을 더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일기라 대수롭잖게 여겨 옷을 가볍게 준비했었는데 실수였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한기를 떨치려 앞만 보고 허겁지겁 걷는다. 오르막 길에도 쉬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헉헉대며 땀방울이 맺히도록 걷다 보니 다소 안심이 된다. 
 
북두칠성, 전갈자리 등 별들이 초롱초롱한 깜깜한 밤에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무슨 근심을 떨치려 입산하는 것일까. 각자 저마다의 아픔이나 근심이 있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꾹꾹 눌러 담고 산에 들면 신기하게도 세상 번뇌를 잊어버리는 맛에 중독된 사람들일 게야. 그래서 산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서북능선 길도 만만하지는 않다. 지극히 험하거나 깔딱 고개는 없지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꾸준히 반복되며 이어져 은근히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만복대를 지나 정령치에 이를 즈음 여명이 밝아온다. 잔뜩 물이 오른 푸른 나뭇잎마다 아직 봄 향기가 저려있다. 신선한 봄 향기를 가슴 가득 밀어 넣으며 고리봉에 이르러 일출을 맞는다. 하루도 그러지 않고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그 태양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또는 마음 가짐에 따라 빛깔과 믿음이 달라진다. 
 
고리봉에서 팔랑치로 이어가는 길은 천왕봉 능선을 조망하기에 딱 좋다. 장엄한 능선을 바라보며 지나온 발자국을 새겨본다. 세상이 힘든 이유는 집착하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세상에 내 것 아닌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돌부리에 걸려도 아픈 게 삶이지만, 그 아픔 또한 가지기보다는 내려놓으면 번뇌를 잊을 수 있다.
 
나에게도 크고 작은 아픔이 왜 없었겠냐만은, 그중 꼭 한 개를 고른다면 얼굴에 웃음이 없다는 것이다. 매번 거울을 볼 때마다 웃어보려 애쓰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습관처럼 근심으로 살아온 마음이 굳어버린 탓은 아닐까. 입산할 때만이라도 찡그린 얼굴을 펴자고 다짐하면서 산에 오르지만, 오늘도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앞만 보고 헐떡이며 내달린다.
 
23km의 산길을 7시간 30분 만에 허겁지겁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하니 출발 예정시간까지 5시간이나 남았다. 산에서 좀 더 느긋하게 걷지 않고 무리하게 진행했던 이유를 굳이 변명하자면 세찬 바람을 피해서 쉴만한 여유가 없었으며, 기대했던 팔랑치와 바래봉 철쭉꽃이 이미 다 저버려서 시간을 지체할 명분이 사라진 탓이다. 그나저나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근심이 또 하나 생겼다.
 
 1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원시 인월 면소재지로 가서 우선 목욕탕에 들렀다. 땀을 씻고 사우나와 온탕 냉탕을 번갈아가며 시간을 메워도 더디 간다. 억지로 한 시간을 채워 밖으로 나오니 한산하다. 농협마트에 들러 두리번거리다가 커피나 한 잔 하려고 카페를 찾으니 보이지 않고 터미널 주변에 다방이 서너 개 있어 한 군데를 골라 들렀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주문하니 얼굴이 좀 부어있고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마담이 콧소리로 반긴다. 아직 어제의 취기가 좀 남아 있는 듯 목소리가 허스키하다.

 

식당에 들러 어탕을 시켜 놓고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며 산행을 정리한다. 산에 들면 여유를 좀 가질 수는 없겠나. 매번 곱씹어보는 주제지만 아직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속박하지는 말자. 다리에 힘 빠지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을 텐데 굳이 채근할 필요까지 있겠나. 

 

식당을 나오면서 신발을 신는데, 등산화 밑창이 너덜너덜하다. 10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밑창 갈이를 세 번이나 하며 함께했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겠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으니 우리도 헤어져야 할 인연이다. 그동안 안전하게 함께했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마음에 담는다. 

 

안녕!

고마웠다.

 

[산행 일시] 2024년 5월 11
[산행 경로] 성삼재 - 만복대 - 정령치 - 팔랑치 - 바래봉 - 구인월(23km)
[산행 시간] 7시간 30분
 

천왕봉
남산제비꽃
벌깨덩굴
산괴불주머니
산딸기
고비
큰꽃으아리
광대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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