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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山 行

덕룡,주작,두륜산

by 桃溪도계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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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과 해남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호남의 알프스라 알려진 덕룡, 주작산의 봄. 진달래와 암릉의 멋진 조화가 아스라이 기억의 파일에 저장된 지 10년은 넘은 듯하다.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몇 번 별렀지만 쉬 기회를 잡지 못했다.

 

서울 양재역에서 밤 11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졸고 있던 새벽을 깨워 도착하니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불 빛을 쫓아 몰려든 부나방을 닮은 그들은 덕룡산의 암릉과 붉은 진달래의 마법에 걸려든 사람들이다. 오징어 배를 연상케 하는 전등을 밝히고 만선을 꿈꾸며 새벽 4시에 가파른 등로를 따라 걷는다.

 

희꾸 무례한 아침이 열리고 이윽고 해가 떠오른다. 그런데 진달래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봉오리들이 서로 곁눈질하며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에 목을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이 서두는 마음보다 봄은 더디 오고 있었다. 꽃보다는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등로에 줄지어 선 산객들이 더 많다. 실망감에 탄식을 할 만도 한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꽃을 쫓아온 상춘객이 아니라, 자존감을 확실히 잡아주는 산의 묘한 매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암릉코스 길이 거칠고 험하다 보니 진행이 더디다. 좁고 가파른 길에서는 병목현상이 생겨 몇십 분씩 기다려야 한다. 조금은 짜증을 낼 만도 한데, 짜증을 섞어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깨달아 버린 성숙된 산 사람들의 마인드가 돋보인다. 다행인 것은 일찍 마중을 나온 진달래가 듬성듬성 피어 있어서 봄바람에 냉랭해진 산객들의 마음을 녹인다. 거기에 더해 제비꽃과 현호색이 군락을 이루고 이미 봄은 왔으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달랜다. 

 

덕룡산과 주작산의 암릉을 지나 오소재에 도착하니 12.5km의 거친 암릉 산행에 이미 지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소재까지가 오늘 산행의 목표다. 버스를 찾으니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지친 마음에 산행을 그만둘까 잠시 망설였다. 목을 축이고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으니 지친 마음이 다소 안정이 된다. 뒤따라 도착한 산행 동행인이 자기는 산행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겠다며, 나한테 두륜산을 다녀오라고 부추긴다. 양말을 갈아 신고 마음을 추슬러 다시 산행에 나선다.

 

산행 들머리는 비교적 순한 길이 이어지다가 노승봉 오르는 입구부터 가파르다. 힘이 들지만 시작한 마음이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노승봉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등로 옆에 보라색 얼레지가 피어 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인연인가. 이번 산행을 계획하면서부터 혹시나 얼레지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마음 한편에 꼬깃꼬깃 숨겨뒀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산행의 피로가 말끔하게 풀린다. 새색시 같은 수줍음에 날씬한 버선을 신고 까치발을 딛고 산객을 반기는 마음이 황송하기까지 하다.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헤어져야 하니 자꾸 뒤돌아 보게 된다. 우리는 숙명의 연인이었다. 다시 또 만남을 기약한다.

 

가련봉을 거쳐 두륜봉에 이르는 길에 하늘다리가 반긴다. 독특하게 생긴 바위에 올라 기념사진 한 컷 찍었다. 웬만해서는 그러지 않는데, 꼭 한 컷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에 들떠서 두륜산과의 인연을 기념했다. 대흥사로 하산하는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대흥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길에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진달래를 맘껏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얼레지꽃을 만났으니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덤이 남는다. 

 

[산행 일시] 2024년 3월 30일

[산행 경로] 덕룡산(소석문 - 덕룡산 동봉 - 덕룡산 서봉 - 첨봉 - 작천소령), 주작산(주작산 암릉지대 - 오소재), 두륜산(오심재 - 노승봉 - 가련봉 - 두륜봉 - 대흥사 - 주차장(21.8km)

[산행 시간] 11시간 10분

 

현호색
고깔제비꽃
사스레피나무
개별꽃
산자고
낚시제비꽃
큰개불알꽃
얼레지
남산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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