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을 오를 때마다 산호초 같은 상고대를 만나리라는 기대감이 있다. 언제나 멋진 상고대를 보여주던 덕유산이었는데, 올해는 찰떡같이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눈에 가려 보지 못했던 산맥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니 또 다른 행운이다.
동엽령에 올랐는데 바람이 예전 같지가 않다. 순한 바람에 햇볕이 쬐는 풍경이 어색하기만 하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비닐 쉘터를 준비했었는데 펼쳐보지도 못했다. 컵라면과 간단한 요기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동엽령에서 향적봉 오르는 길이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유달리 지루하게 느껴진다. 상고대가 터널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사진 찍느라 지루한 줄 모르고, 바람이 세차고 추울 때에는 앞만 보고 고통을 벗어나려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던 까닭이리라.
속을 다 드러내고 환하게 우리들을 맞는 능선길을 걸으면서 작은 다짐을 한다. 더 보태지도 말고, 더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대자연의 품에서 오롯이 자연과 호흡하기 위해서 위선을 걷어내자. 나는 이 산 길에서 내 작은 경험과 지식을 배제한 체 순수하게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기를 바라노라. 굳이 이 멋진 산이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향적봉 정상석에는 인정샷을 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다. 그들에게는 인정이 필요했으니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행인 것은 바람이 세지 않고 춥지 않으니 내 마음이 편하다.
하산 길에 동남아에서 온 듯한 여행객들이 두꺼운 외투를 꽁꽁 싸매고 힘겹게 산을 오르는 일행을 만났다. 그들에게는 하루 종일 눈 밭을 걷는 이 하루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다만 나뭇가지마다 달린 산호초 같은 상고대를 보여주지 못함은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그들에게 송구한 마음이다.
백련사에 도착하자마자 속이 불편했던 친구가 근심을 해결했다. 이 또한 행운이다. 끝까지 잘 참고 함께 동행한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몸이 불편해서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근심이 많았을 텐데 끝까지 인내하며 마무리한 멋진 친구.
갑진년, 안전하고 행운 가득한 한 해 되기를 기원하며 긴 산행길을 거둔다.
[산행 일시] 2024년 1월 6일
[산행 경로] 안성 탐방센터 - 동엽령 - 중봉 - 향적봉 - 백련사 - 무주구천동계곡 - 삼공 탐방지원센터(18.5km)
[산행 시간] 6시간 30분
山 行
덕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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