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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隨筆, 散文

금곡댁

by 桃溪도계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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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를 하거나 상을 당하면 종종 모이기는 하지만 여행을 목적으로 모두 모인 일은 기억에 없다. 그동안 자매들이 모여서 여행을 가기는 했어도 어느 날에는 다섯째가 빠지고, 또 어떤 날에는 여섯째가 빠져서 여섯 자매 모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맏이가 아랫동네 돌찌로 시집을 들 때 19살이었으며, 그의 신랑은 한 살 연하인 18살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급하게 여자 손이 모자라 아들을 볼모로 며느리를 본 셈이다. 시집가자마자 홀 시아버지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는데 철없는 신랑은 건듯하면 외박하고 동네 다른 처녀들과 어울려 극장 구경이나 시장을 다니며 술판이나 놀음판에 기웃거렸다. 올해 75 살인 금곡댁이 시집 살며 고생한 일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밉다 밉다 하면 미운 짓만 골라한다더니 70 살이 되기도 전에 영감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한평생 살면서 태산 같이 쌓인 미운 감정은 춘 삼월 초가지붕에 쌓인 눈 녹듯 사라지고 서리서리 그리운 정만 가슴에 남아 속상하고 또 속상하다. 평생을 친구처럼 함께했던 천식이 가슴을 옥죄어 숨을 그렁거리는 밤에는 영감이 더욱 그립다. 술판과 놀음판을 밥 먹듯 쏘다녀도 애 낳는 재주는 타고나서 명석, 현석, 미영 삼 남매를 낳았는데 촌에서는 아이들 교육하고 키울 방법이 없어 부산에 터전을 잡고 열과 성을 다해서 키웠지만, 자식들 뒷바라지 제대로 못해준 것 같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가는데도 늘 아쉬움이 남는다.

나름 눈이 높은 둘째는 면소재지인 풍각으로 시집 들었는데, 신랑이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아 외모에 홀딱 반해서 결혼했다. 결혼 당시 신랑은 형이 운영하는 가전제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입만 먹고살아서 돈 한 푼 없이 장가를 든 셈이다. 색시 반지 해 줄 돈이 없어 장모가 사위한테 돈을 꿔줘서 반지를 마련했으니 할 말 다 했지 뭐. 그러니까 장모가 딸 시집보내고 있는 돈 없는 돈 구해서 사위 장가 들 준비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 그렇게까지 서둘지 않아도 되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시집가겠다고 댓바람에 난리를 피우니 언니가 쫓겨서 시집가는 형국이어서 호들갑을 떨었던 거야. 어렵사리 신혼을 시작했으면 열심히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미장원을 열어서 살림에 보태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열심히 살았던 공은 흔적도 없고 건듯하면 마누라 두들겨 패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대구로 거처를 옮겨 진영, 규빈 남매를 키우느라 애는 썼지만 아이들한테 부끄러움을 많이 쌓아 늘그막에 효자 아들 보기가 민망하다.

스무 살 되기 전에 양장 기술을 배우러 도회지로 나간 셋째는 양장 기술을 배워 돈 벌기 시작할 때쯤 양복쟁이 총각한테 눈이 맞아 시집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대니 부모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마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야. 아직 둘째도 생각 않고 있는데 셋째부터 시집을 보낼 수는 없어서 부랴부랴 서둘러서 둘째 시집보내고 연이어 셋째가 시집을 들게 된 거지. 이 대목에서 둘째와 부모는 회한이 많이 남았어.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은 대목이었지. 그나저나 셋째는 시집가서 영천에서 터전을 잡아 홀시어머니 모시고 양장점을 열었으며, 신랑은 옆에 나란히 양복점을 열어서 영천 금호 터줏대감이 된 거야. 좁쌀 같은 영감이 미울 때도 많지만 착한 구석이 있어 그런대로 살만은 했어. 주영, 윤미, 재호 삼 남매 낳아서 알콩달콩 잘 살았지만 막내가 혼기가 늦었는데도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며느리 얼굴이나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황소를 닮은 천하무적 넷째는 스무 살 갓 넘은 풋풋한 처녀 적에 친구들과 재 넘어 현풍에 봄놀이 갔다가 동네 건달들이 꼬드기니 순진하게 넘어간 거야. 대뜸 부모님한테 시집가겠다고 입을 쑥 내미까 부모 입장에서는 둘째, 셋째 연거푸 시집보내느라 아직 빚 갈무리도 못하고 한 숨 돌리려던 차에 넷째가 떡 버티고 있으니 기가 찬 거야. 당연히 쉽게 승낙이 떨어질 리가 만무하지. 이번에는 부모님도 딸을 불쑥 내줄 수는 없다고 버티는데 현풍에서 재 넘어와 집에 들이닥쳐 딸을 내놓으라고 으름짱을 놓는 거야. 부모님은 말문이 딱 막히고 발걸음도 뗄 수 없는 지경이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끝까지 버텨보려 애썼지만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마당에 병풍을 치고 초례장을 차려 결혼식을 올려 딸 넷을 내주고 나니 가슴이 텅 비었어. 어린 나이에 천지도 모르고 남들 가면 가는 줄 알고 시집을 갔더니 시할머니, 시어머니 칭칭 시하 시집살이가 시작된 거지. 신랑만 믿고 왔는데 신랑은 색시만 데려다 놓고는 온데간데없이 천날만날 술 마시고 마누라를 습관적으로 때려 시집 못 살겠다고 보따리 사들고 새벽이슬 헤쳐 친정에 오면 댓 새벽부터 부모님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거야. 어쩔 수 있나 딸 가진 게 죄라서 달래고 또 달래서 데려다 주기를 한 두 번이었어야지. 한 많은 시집살이에 그 한을 어찌어찌 다 누르고 삭여가며 현구, 현정 남매를 낳아 키웠는데 딸의 혼기가 늦어 체한 듯 가슴앓이가 길어진다.

애교 많은 다섯째는 이서에 있는 친구가 소개를 해서 신랑을 만나 삼 년 간 연애하다 결혼했다. 처녀 적부터 결혼 안 하고 시골에서 부모님 모시고 목장을 할 것이라고 떵떵거렸는데, 볼품없고 못생긴 총각한테 마음이 홀려 팔자를 바꾸게 된 거지. 제 판단에는 성실하겠거니 생각해서 베필 감을 정했는데 친정 쪽에서 다들 신랑 못생겼다고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신랑 직장이 서울이어서 신접살림은 서울에서 하면서 시골에 사는 별난 시어머니 등쌀에 힘은 들어도 큰 대과 없이 수진, 동훈, 동호 삼 남매를 낳아 잘 키웠어. 그런데 늘그막에 영감이 꾸려가던 사업이 부실해서 가정을 지키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직장 다니느라 수고가 많다. 남들은 아이들 다 키워 내 보내고 현업에서 손 떼고 좀 여유 있게 살면서 노년을 준비할 나이인데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작업을 하느라 애쓰면서도 밝은 내일을 꿈꾼다.

욕심쟁이 막둥이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친구 소개로 만난 예천 신랑과 결혼하여 인천에서 터 잡고 살면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에서 늘 허기진 삶을 살았다. 대충 살다가 죽을 수는 없기에 민성, 지영 , 유진 삼 남매 낳아 울며불며 키웠다.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는 야망을 접지 못해 마지막 동아줄을 잡고 시달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격에 맞는 일을 하며 지낸다. 하지만 신랑과의 호흡이 편하지 않아 맨 날 잡음을 내고 있다. 이제 나이도 지긋해지는데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한 시기다.

금곡 초가삼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객지로 나가 삶의 방편을 구하다가 결혼하여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아오던 여섯 금곡댁이 석모도 펜션 방 한 칸에 모였다. 지난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깔깔대다가, 가슴을 치다가, 스스로에게 미친년이라고 욕도 하다가 달이 바다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밤을 새웠다. 그래도 날이 밝지 않으니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를 꺼내 놓고는 훌쩍이다가, 흉도 보다가, 원망도 하다가 밀물이 밀려오는 아침에 바다에 나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상념들을 뿌려도 지나간 세월은 돌아오지 않는다.

만남의 기쁨이 좋기는 하지만,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탓에 만날 때마다 자잘한 이유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한다. 그렇지만 세월에 묻어두고 살다 보면 저절로 삭아진다. 가끔은 심하게 다투는 날도 있지만 자존심 세우기보다는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조금씩 낮춰 세월에 걸어놓고 빛바랜 뒤 돌아보면 별 일 아니다. 그때는 지난 일이 겸연쩍어 못난 자신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만날 때의 기대감보다는 헤어질 때의 아쉬움이 더 커야 금곡 댁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하자. 남은 세월 서로 얼굴 맞댈 때마다 철 지난 해당화 붉은 열매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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