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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隨筆, 散文

物緣물연

by 桃溪도계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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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전 큰 아들의 중매로 너를 처음 만나던 날이 기억난다. 매끈하게 잘 생긴 몸매에 흠잡을 데 없이 깐깐한 목소리를 창창하게 뽐내던 너에게 난 첫눈에 반했어.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어리바리하게 실수가 잦은 나는 네가 귀에서 빠졌을 때, 눈에 잘 띄어야 찾기 쉽겠다 생각해서 분홍색인 너를 선택했던 거야. 

 

며칠 전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잖아. 버스정류장에서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 없이 멍하니 서 있었는데, 너는 답답한 귓바퀴를 뛰쳐나와 또르르 굴러 정차해 있던 시내버스 뒷바퀴 앞에 딱 멈춰 선거야. 눈을 마주치고는 얼른 잡고 싶었는데 버스가 움직일까 봐 어정쩡하게 고민하고 있었어. 재빨리 버스 기사한테 문을 두드리고 너를 건졌어야 했는데, 아주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선택하지 못했어. 육중한 버스의 바퀴가 서서히 굴러 너를 밟고 지나갔어. 너도 아팠겠지만 나도 많이 아팠단다. 무사하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하며 기다리는데 그 짧은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숨도 쉬지 못했다. 버스가 지나가고 다소 찌그러진 얼굴로 나타 난 너는 나의 왼쪽 이어폰. 얼른 주워서 모래를 털고 이리저리 꾹꾹 눌러 원형대로 복원하려 시도해봤지만 온전하게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귀에 꽂아 소리를 들어보니 잡음이 약간 있기는 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듯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 아직도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상처가 남은 네 모습을 보면서 더 살갑게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이다.

 

엊그제 일산 백병원 장례식장에서 소주 한 잔 마시고 대화역에서 전철을 타고 너를 끼고 유튜브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며 깨며 연신내역에 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와서 너를 내려놓고 케이스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는 거야.  순간 당황했지만 현실이었어. 너는 집을 잃어버린 거야. 잘 알다시피 집을 잃었다는 것은 에너지를 공급받을 원천을 상실한 거야. 당일날은 시간이 늦어 이튿날 지하철 유실물센터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말하니까 내가 찾는 물건이 접수된 게 없다는 거야. 은근 기대가 있었는데 힘이 쫙 빠지더라. '어쩔 수 없죠 뭐'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려는데, 오금역에 분홍색 이어폰 케이스 하나가 있는 것 같다며 전화를 돌려줬어. 다시 담당 직원에게 생김새와 매무새를 말하는데 자꾸 희망이 생기는 거 있지. 말하면서도 살짝 기분 좋았어. 결론적으로 오금역에 접수되어 있다는 통보였어. 엄청 기뻤지.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 이어폰 케이스를 찾지 못하면 너와도 이별을 해야 하잖아. 내성적인 내가 다시 다른 이어폰을 만나 새롭게 사귀며 정을 쌓아간다는 게 좀 부담스러웠거든. 지방에 출장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지체 없이 직접 찾으러 가서 다시 너를 만나게 된 거야. 불과 열흘 상간에 별의별 이별수가 생겼는데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다시 햇볕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미안하다.

못난 나를 만났으니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어쩌겠어.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고 더 많이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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