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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隨筆, 散文

서울대공원 둘레길

by 桃溪도계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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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을 앞둔 친구에게]
 
누구나 한 번 쯤 들어가고 싶어하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도 권태롭고 짜증 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당장 때려치우겠다며 다짐을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때때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발목이 잡히곤 했다. 어쩌면 용기가 부족했다고 말하는 게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때 회사를 그만뒀더라면 이유도 모를 행복감에 잠시 젖었을 수는 있었겠지만, 이내 불안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의 권태로움을 벗어나는 일은 궁극의 행복을 찾는 일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또 다른 방편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권태를 벗어나려면 그 이면에 붙어 있는 불안을 떼어내야 하는데, 선택의 기로에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이 직장생활 30년 이상 했으니 정년퇴직을 했거나 준비 중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직장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일희일비의 무대에서 성심껏 연기한 덕분에 자식들 원만히 키우고 나름 보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묶어둘 수가 없었으니 원망이나 후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아이들도 다 자라 부모의 손이 그리 필요치 않은 시간이 되었다. 속박이나 권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년퇴직의 문지방을 편하게 넘을 수 있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불안함 따위는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닥쳐보니 어딘가 모르게 두렵다. 잉여인간으로 살아가기에는 남은 세월이 너무 길고, 다시 제2의 일을 시작하려니 자신이 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 봉사만 하며 지내기에는 경제력도 만만치 않다.
 
막연한 두려움에 싸여 움츠러드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친구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시게. 아침에 일어나면 시원한 공기와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을 하고,  느긋한 커피에 지난 세월을 한 두 스푼 타서 가볍게 저어가며 명상을 하듯 마시게. 그러고도 여유가 생기거든 거실 청소를 하고,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남았거든 마누라 깨지 않게 조용조용 설거지를 하시게. 결코 마누라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라는 얘기는 아닐세. 긴 세월 지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오점으로 남겼을 타인에 대한 상처나 자신에게 남아 있을 교만을 씻어내는 엄숙한 의례라 생각하시게.
 
그동안 미뤄뒀던 취미를 들춰보시게. 조용히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좋겠고, 건강을 겸한 춤이나 자전거, 등산 같은 취미도 좋겠네. 그리고 틈틈이 책도 읽고 관심 있었던 분야에 관한 전문 서적을 탐독하면서 기회가 되면 강의를 듣거나 동호회를 찾아다니며 함께 참여하는 방법도 좋겠네. 
 
한 달에 한 두 번 마누라 손 잡고 여행하는 것을 꼭 추천하고 싶네. 여행도 몇 번 하다 보면 자칫 식상할 수도 있으니 섬 여행, 축제 여행 등 테마를 정해서 하면 할만할 걸세.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도 잊지 마시게. 가끔은 가족여행도 꼭 챙기시게.
 
그동안 소홀했을 친구들과의 시간을 많이 갖기를 권하네. 요즘은 백세시대라 노년의 시간이 길어짐을 피할 수는 없으니,  먼 길을 혼자 간다면 외롭고 지쳐서 쓰러질지도 몰라. 그러니 함께 손잡고 가야 멀리 갈 수 있음을 명심하고 없던 친구도 만들어서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게. 이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필연의 영역임을 잊지 마시게.  가다가 목마르면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면 슬기로운 시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행여 취업의 기회가 생기거든 망설이지 마시게. 잠시 정년을 미룬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권하네. 소득이 많고 적음을 떠나 사회 참여의 기회라 생각하고 주저하지 말고 잡으시게나. 그런다고 질퍽거리는 느낌은 들지 않게 잘 관리하시게. 다만 취업의 기회인 것처럼 위장한 사기가 아닌지 신중하게 확인한다면 환영일세. 
 
사실 제일 먼저 권하고 싶은 게 있었다네. 다름이 나리라 사회 봉사 활동을 적극 권하고 싶다. 굳이 명예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자신의 재능이나 열정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참여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봉사 활동은 얼핏 보기에는 남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자신을 진심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봉사활동 하면서 자신의 결함이나 단점이 있으면 보완하고 남을 대하는 데 있어서 소홀함이 없었는지 차분하게 훑어볼 수 있는 기회여서 자기 성찰을 하는데 이만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여유가 생기거든 조그만 텃밭 하나 마련해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어 생명이 돋아나는 경이로움을 함께하기를 권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몸속에서 뒷방 늙은이로 은둔하고 있던 나태해진 세포를 깨워 활력을 불어넣어 신선하고 멋진 새 친구를 얻어시게나.
 
친구야!
무사히 정년을 맞이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우리 인생에서 한 매듭을 짓는다는 것은 장막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다짐이니까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말자. 어쩌면 우리는 처음 취업할 때처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막연한 출발점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망함이 가슴에 가득 차면 자칫 우울해질 수 있음을 경계하자.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하루하루를 새겨보자.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건강이다.
자네도 짐작은 했으리라 생각한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철학을 주고받되 비틀거리지는 말자.
그리고 절대로 비겁해지지 말고 언제나 당당하자.
행복은 바로 이 순간이다.
아끼지 말자. 
아끼려다 자칫 아까워지게 된다 카더라. 
 
[산행 일시] 2023년 4월 2일
[산행 경로] 대공원역 - 둘레길 - 대공원역(10km)
[산행 시간] 4시간
 

종지나물
산괴불주머니
개별꽃
현호색
조팝나무
명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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