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라고 말한 그라시안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우리들만의 새로운 우주를 구축한 셈이다. 이 우주에는 외부의 침입이나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언제나 행복 바이러스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들은 마냥 웃으며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의기양양한 용사들이 뭉쳐 대항해를 시작하기로 한 날 새벽부터 졸고 있던 첫 차를 깨웠다. 목적지인 백령도로 향하기 위하여 인천 연안여객터미널로 모여들었는데, 대합실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국임을 잊은 듯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렇게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이 그동안 갇혀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한 편으로는 동정이 간다.
7시 50분 출발 배표를 받고 백령도를 점령할 생각에 설렘을 겨우 다독이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백령도와 연평도 배는 짙은 안개로 8시 30분까지 출항 대기 명령이다. 우리는 용맹한 우주의 용사니까 이 정도는 견딜만하다. 애써 태연한 척 막걸리 잔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시간을 꼭꼭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선명하지 않고 잡음이 많은 안내방송이 열린다. 백령도 배는 짙은 안개로 11시까지 출항 대기니까 안전한 대합실에서 다음 안내를 기다리라는 명령이다
문제가 생겼다. 당초 백령도 점령은 2박 3일 일정이었다. 그런데 정보요원들의 정보에 의하면 오늘 출항하더라도 2박 3일은 무리라는 것이다. 3일째 돌아오는 배편이 일기가 불편하여 출항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오후에 출항하더라도 하룻밤 자고 내일 오전 일정만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령도를 정복할 수 있는 시간이 내일 오전 시간만 허용된 셈이다. 아무래도 이번 출항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이미 틀렸다. 용사들의 의견을 모았다. 이번 출항에서 백령도 정복은 불가능하니 승봉도로 배편을 돌리자.
승봉도행 12시 배를 예약하고 흩어진 마음들을 추스르고 있는데 안내방송에서는 백령도 배편이 오후 1시까지 출항 대기란다. 이럴 때 인간의 감정에는 묘한 승리감이 스며든다. 행선지를 바꾸길 참 잘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당초 설레었던 흩어진 감정들을 모아 다시 재무장한다.
1시간 남짓 배를 달려 드디어 승봉도 별에 안착했다. 자그마한 섬에는 주민들이 오손도손 농사짓거나 뱃 일 하면서 살아가는 평온한 섬이다. 최근에는 여행객들이 붐비는 터라 펜션이나 식당을 꾸려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바닷가를 산책할 수 있게 도로 정비도 대체로 잘 된 편이며 올망졸망한 해수욕장이 많아 여름 휴양지로서 적격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만난 여행객들도 모두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승봉도 점령은 성공이다.
첫째 날 저녁에 승봉도를 술통에 빠뜨려버리겠다는 야심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소주 몇 잔 취기가 돌자 다를 비실비실한다. 새벽잠을 깨워 출항 대기에 시달린 심신이 버티지를 못하고 다들 쓰러졌다. 승봉도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고 짙은 구름과 굵직한 바람이 용사들의 욕망을 재웠다.
이튿날 아침부터 어제 못 마신 술에 분풀이라도 하듯 벌컥벌컥 들이켜니 승봉도는 겁도 없이 기세가 오른다. 배가 떠나든 말든 세상은 그런 거야. 취기를 빌어 허세를 부려대는 승봉도가 깜찍하다. 환갑을 맞아 당초 백령도를 점령하기로 했지만 시절 인연이 닿지 않아 승봉도에서 객기를 부려대도 배는 제시간에 출발한다. 아침부터 바람이 많아 혹시 배가 뜨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다시 만난 인천항은 백령도를 다녀왔는지 승봉도를 다녀왔는지 관심도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우리들은 차이나타운에 들러 고량주를 마시고 취기가 그나해져도 멈추지 않고 맥주를 막 들이켜대니 취한다. 친구 말처럼 아침부터 계속 취해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술 깨고 난 후의 일들은 그때 가서 알아서 할 일이고 일단은 취했으니 행복할밖에. 결국 용사들의 행복바이러스는 알코올 속에 숨겨놨던 것인가 보다.
우리들의 환갑여행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운 해방감과 술에 취한 행복뿐이다.
친구들아!
우리들의 또 다른 행복을 위하여 건배!
[일 시] 2022년 6월 25일 ~26일(2일)
[장 소] 인천시 옹진군 승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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