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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行

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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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가을을 떠나보내려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의식처럼 한 번쯤은 읊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났다.

먼지 풀풀 날리는 탈고한 원고지 더미를 들추어 끄집어낸 이야기들을 종알거리며 애써 웃어보지만 퇴색한 세월의 그림자는 흔적으로 남아 성곽 돌 틈 사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낙산 성곽길 따라 걷다가 이화동 벽화마을 담벼락에 기대어 다시 헛한 웃음을 지어본다. 속이 꽉 차지 않는 웃음이라 주름이 많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 본성의 욕망 탓이려니 다독여본다. 한 때는 마천루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는 꿈도 꾸었지만 세월에 쫓기다 보니 헛된 꿈이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을 위안으로 삼고,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린 갖은 욕망들을 움켜쥐었던 빈 주먹을 힘주어 꽉 쥐어 본다.

 

옛 동대문 야구장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기묘한 건축물인 DDP를 세웠다. 가장자리에는 야구장 조명탑이 흔적으로 남아서 지나온 세월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버티고 있다. DDP를 설계한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몇 해 전 아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엇을 남기려 했을까. 그에게도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그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떠났던 것일까. 

 

국립의료원 뒷골목 연탄 돼지갈비를 파는 식당에는 파란색 플라스틱 접이식 테이블 서너 개 도로에 펼쳐놓고 허기진 객들을 붙잡는다. 술을 비우고 난 빈 병에 삼십 년의 때 묻은 이야기가 채워지고 술병을 잠궈지도 않았는데 취해서 쓰러진다. 쓰러진 술병에서 쏟아져버린 문학은 외롭다. 네 갈 길을 나는 모르겠다.

 

광장시장은 취해서 비틀거리며 해거름이 닿은 청계천에 가슴을 내밀고 콧바람을 쐰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다시 서러운 문학을 이야기한다. 술이 깨면 문학이 떠나버릴까 봐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술이 깨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떠나야 한다.

 

[일    시] 2021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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