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 공룡능선
자연...
스쳐가는 일상같지만 그 어느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게 있으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짬을 내어,
공간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면 가끔은 경이로운 자연을 만날 수 있다.
공룡능선
늘 마음에 두고 짝사랑했던 그를 만나러 산을 오른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법.
새벽 3시 30분에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을 향하여 첫발을 들여놓을 때는 좀은 서글펐다.
가을비가 오락가락하며 산인들의 마음을 흔든다.
다행히도 산에 오르자마자 약속이나 한듯이 비는 뚝 그쳤다.
일출을 접선하려는 마음은 접고
깜깜한 밤을 헤집으며 땀을 비오듯 흘릴뿐이었다.
산 중허리에 올랐을까.
여명이 새벽을 깨우며 대지의 어둠을 걷는다.
호흡을 몰아가며 뒤 돌아보는 내 눈으로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막연하게 기대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때의 그 기쁨은 경이롭다는 말 이외에 어떻게 표현할까.
설악산 운해다.
오직 내 몸을 움직여야만 만날 수 있는,
그 누구에게도 이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줄 수 없는 운해를 보는 순간,
산에 오르기전에 잠시 가졌던 염려와 서글픔이 한꺼번에 싹 가신다.
산행길 좌우로 병정들이 투구를 쓰고 도열하고 있다.
힘든 우리들을 따뜻한 향기로 맞아준다.
그들은 우리가 산에 오르는줄 어찌 알았을까.
새벽부터 투구를 쓰고 전투차림을 갖추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곳곳하게 서 있는 투구꽃에는 범치 못할 위용이 있다.
대청봉 정상에 오르면 천하가 발 아래다.
몇 번째 오르는 대청봉이지만 해를 맞지는 못했다.
대청봉은 오를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비단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리라.
수천 수만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느낌이 수천 수만가지가 있으리라.
대청봉 발 아래에 천불동 계곡과 멀리 울산바위를 에워싸듯 구름이 바쁘게 움직인다.
아름다운 의식을 준비하는가보다.
속세에 살면서 갖가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 우리들이 볼까봐 서둘러 감춘다.
구름이 하얗다
선녀가 목욕을 하고 미처 추스러지 못한 속살을 내 놓기가 부끄러워서 구름으로 덮고 있나보다.
하얀 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목욕을 마친 선녀가 구름을 둟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겠다.
죽치고 앉아서 선녀와 안부를 나누고 싶지만
갈 길이 멀어서 아쉽다.
다음에는 꼭 선녀를 만나리라.
내 몸속에 담겨있던 헛된 욕망과
못난 심통을 땀으로 쏟아내고나니 한결 후련하다.
몸 보다는 마음이 먼저 가벼워진 느낌이다.
이렇게 살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늘상 비우기를 원하면서도 비워지면 또 채워야 하는 근성을 어찌 탓하랴.
어쩌면 그것이 완전한 나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중청산장에 들러 아침을 먹는다.
바람개비 같은 작은 풍차 한대가 숨가쁘게 돌아간다.
나도 가끔은 저렇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싶다.
세상눈치 보지않고
바람만 불면 미친듯이 돌아가고 싶다.
대청봉 정상 아래에
지난 여름 장마에 산사태가 나서 허옇게 속살을 드러내고 신음하고 있다.
잠시 구름이 상처를 덮어준다.
많이 아프겠다.
그렇지만 동정같은 것은 필요없다.
이것마저도 아름다운 자연이다.
군데군데 단풍이 든다.
한해를 열심히 살았던 나무가
이제는 또 다른 무대를 위하여 장막을 걷으려고 준비중이다.
다른 나무보다 더 빨리 단풍이 든 나무는
몸이 아팠을까.
아니면 연극무대에 빨리 올라야 하나.
너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너를 맞는 우리들 가슴은 왠지 뭉클하다네.
네가 지울 낙엽이
내 가슴의 그 무엇과 많이도 닮아있는 탓일게야.
나도 가을이면 내 가슴에서 단풍 든 낙엽을 지울거야.
그래서 내년 봄이면 또 다시 파란 새싹을 틔울거야.
지난 장마에 무심히 쓰러진 나무.
네가 욕심껏 키를 키우지 않았으면 넘어지지도 않았을텐데..
뭣하러 욕심을 부렸을까.
너는 어쩔수 없었다고 말할테지.
쓰러지는줄 알면서도 양껏 물을 빨아올리고 햇볕을 잡아서 챙겼다고 말할테지.
네 말이 맞다.
나도 내 삶의 끝에는 죽는줄 뻔히 알면서도
한 숟갈의 밥에 눈알을 부라리고
한 푼의 돈에 양심을 구겼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랴.
너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고맙다.
안녕..
잘자라.
다음에 또 보자꾸나.
희운각을 거쳐 신선대에서 함께한 산우들과 기념촬영..
이제 공룡능선을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는 공룡능선을 오르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지치기도 했지만,
돌아 설 수 없는 길이다.
아름다운 인연이었기에
더 많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공룡의 뾰족뾰족한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공룡능선과의 두번째 만남이다.
공룡은 변함없이 기개가 넘치고
나는 당신을 만나는 감개무량함을 감추지 못하겠다.
저 많은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려면 많이 지치겠지만,
우리들이 선택한 길이다.
분명한것은 우리들이 선택했다 하더라도
공룡이 품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감히 범접 할 수 없다.
공룡이 잠자는 틈에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능선을 넘어야한다.
나도 조심하겠지만,
하늘도 심술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맑은 하늘에
울산바위가 위용을 드러낸다.
언제봐도 든든한 모습에
조급했던 내 마음이 순해진다.
공룡능선의 뾰족뾰족한 굽이를 넘다가 지칠때마다
울산바위를 보면 한결 수월해진다.
묘한 조화다.
어느것하나 가볍게 넘길수없다.
좌측으로는 용아장성릉이 뻗어있어 우리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우측으로는 울산바위를 비롯한 천불동의 협곡들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준다.
우리는 감동으로 가득찬 가슴이 터지던지 말던지 게의치 않고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설령 더 아름답다한들 무슨가치가 있으랴.
내 작은 가슴에는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담을수가 없다.
나는 오늘
공룡능선을 걸으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이 모든것들이 과분하다.
더 이상 욕심을 내고 싶지도 않지만,
욕심을 낼 수도 없다.
1275봉 앞에 섰다.
이쯤 되면 많이 지친다.
새벽에 산행을 시작해서 대청봉, 중청, 소청, 신선대를 거쳐 공룡능선에 올라서 서너개의 봉우리를 넘었다.
저 높은 봉우리를 어떻게 넘어갈까.
한 숨을 돌려본다.
일행중에 무릎이 좋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다.
그는
힘들어 하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구도자의 마음으로 무장을 한다.
공룡능선을 무사하게 넘어 갈 수 있게 해주기를
간절한 바람으로 겸손을 새긴다.
멀리 귀때기청봉이 구름을 이고있다.
그는 대청, 중청, 소청과 뚝 떨어져 혼자서 삐진듯이 우뚝 솟아있다.
그도 그럴법하다.
그 옛날
혼자 우뚝 솟아 있어서 저 잘난맛에 자기도 청봉이라고 우기다가
귀때기 맞았다고 귀때기청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도 억울한데 귀때기까지 맞았으니 서럽다.
그렇지만,
소청 옆에 붙어 있었으면 존재감마저 상실되었을텐데..
혼자 우뚝 솟아있으니 가끔은 다른이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어서 자랑이다.
나한봉이 손을 모으고 멀리 귀때기청봉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의 안녕을 기도하고 있나보다.
혼신의 힘을다해 1275봉을 넘었는데..
또 다시 힘을모아 나한봉에 합장해야 한다.
저 험한 고개를 어떻게 넘나..
그래도 한 발 한 발 옮기다보면 길은 어느새 줄어든다.
그것이 인생이다.
산행을 이어가다가 뒤돌아 보는 맛도 일품이다.
멀리 대청,중청,소청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다시 저 산으로 돌아가라면 돌아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려서 살 수 있다면 뭐든지 잘 할 수 있을거라 장담한다.
10년만 젊었으면,
5년만 젊었으면 내가 걸어온 길 보다는 훨씬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를 하리라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경우가 좀 다르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않다.
뒤돌아서 다시 삶을 설계한다 하더라도 더 잘 할 자신은 없다.
그냥 내가 주어진 길위에서
조금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내 욕심을 줄여가며 살아갈것이다.
내게 좀 더 많은 젊음이 주어지면 좋겠지만,
그것도 욕심이다.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서 이만큼 거리를 줄여왔다.
또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해도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길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만 간다.
물론 아쉬움이나 후회가 왜 없겠냐만은
그정도는 내가 감수해야한다.
공룡능선을 넘어오면서 파란 하늘이 너무 좋았다.
이제 두세개만 더 넘으면 능선의 장도를 마무리하고 하산길에 이른다.
그런데 그냥 쉽게 넘어가도록 두지 않는다.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친다.
심술을 부리는구나.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겠다.
설악산은 천의 얼굴이다.
새벽에는 비가 내리다가
대청봉에 오를 즈음에 하늘이 열리면서 운해로 뒤 덮였다가
희운각으로 가는 길에 운해마저 지워지고 파란 하늘이 우리들 지친 가슴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기도 했는데
이제 또 다시 먹구름이 몰려온다.
거부할 수는 없다.
순응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순응해야 한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고나서
다시 파란 하늘이 열린다.
이것이 인생이다.
내가 지금 힘든 것은
다음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자양분을 채우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힘들 때는 행복한 웃음을 기억하고
행복할 때는 힘들 때를 생각하며 지나친 웃음을 경계해야 한다.
마등령에서 오세암을 거쳐 영시암에 이르는 길이 지루하다.
그만큼 많이 지친 탓이다.
뚜벅뚜벅 길을 내려오면서
줄어들지 않는 길에 짜증을 내보기도 하지만
내 삶을 탓할수는 없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은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 줄 수도 없는 길이다.
오직 내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오랜 시간동안 산행하면서
그만큼 더 많이 나를 비울 수 있었고,
욕망이 비워진 가슴에 더 많은 겸손을 담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공룡..
당신을 만나서 나는 행복하다.
한동안 당신을 기억하면서 웃을 수 있을것이다.
* 일 시 : 2009년 9월 12일
* 산 행 로 : 오색약수 - 대청봉 - 중청봉 -소청봉 - 희운각 - 무너미고개 - 신성봉 - 1275봉 - 나한봉 - 마등령 - 오세암 - 영시암 - 백담사
* 산행시간 : 15시간
* 위 치 : 강원도 양양, 인제군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