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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일벌과 강아지

by 桃溪도계 200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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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벌과 강아지


   일벌은 벌침을 하사받으면서 여왕벌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명분 없는 잔꾀나 술수로 벌침을 버리는 일은 없다. 적을 공격하라

는 명령이 떨어지면 조직을 위하여 본능적으로 벌침을 꽂고 자신을 던질 뿐, 벌침의 길고 짧음을 견주지 아니한다.

  

   벌 세 통을 들여와서 사과나무 꽃가루 수정에 동원했다. 꿀보다는 봄 한 철 꽃가루 수정을 위해 일 년 동안 양봉에 정성을 기울인다. 두어 번 꿀을 따기는 하

지만, 잿밥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벌들이 정열적이고 충성스럽게 일한 덕택에 초롱초롱한 사과가 닥지닥지 달렸다.

  

   사과가 제 모양을 갖추면서부터는 농약 치는 횟수가 늘어난다. 일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왕과 집단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사과밭 주변에 진을 친다. 꿀

을 얻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숭고하다. 농약이 흩뿌려지는 열악한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다가 농약중독으로 개체수가 점점 줄어 가을쯤 되면 두 통은 전

몰하고 한 통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얼거나 굶어 죽을까 염려하여 벌통을 보온 덮개로 감싸주고 설탕을 끓여 보충 식량으로 넣어준다. 모진 겨울을 나면서 절반은 얼어 죽고,

간신히 반 통만 남아 생존의 명분을 이어간다. 이듬해 봄, 사과 꽃이 피기 전에 벌 두 통을 새로 들여와 남은 반 통과 합하여 간신히 세 통을 만들어 꽃가루 수정

작업에 대비한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던 이른 봄에 5일장에 들러서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식구로 늘렸다. 농사일이 바빠지면 집을 지키는 날보다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

아진다. 집을 비우는 틈을 이용하여 한적한 공백을 노리는 도둑으로부터 벌통이나 소를 지키기 위해 강아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입술이 도톰하고 눈빛이 그윽하던 강아지는 봄볕이 따사로워지고 사과꽃이 필 무렵쯤에는 제법 커서 식성도 좋아지고 애교도 늘어 귀염을 독차지하였다. 그

러던 어느 날, 강아지가 봄볕을 이불삼아 게으른 기지개로 응석을 부리며 노는가 싶더니, 낑낑거리며 뒹굴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니 쥐벼룩이

아지트를 짓고 진지를 점령한 상태다. 밭에 일 나가시던 아버지가 스프레이 모기약을 강아지 온몸에다 뿌리고 목줄을 단단히 묶어놓고 집을 비웠다.

  

   그 날, 해거름에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데 분위기가 썰렁하다. 대문을 열면 기꺼이 반기면서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불

길한 기운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기가 찰 노릇이다.

  

   확인해보니 콩 타작마당에 까만 콩이 수북이 쌓여 흩뿌려진 것처럼 벌통과 마루주변에 일벌들이 새까맣게 죽어 있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어 이리저리 허

둥대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일벌들만 죽은 게 아니라 강아지도 마루 밑에 널브러져 있다.

  

   벌들은 모기약을 온몸에 덮어쓰고 독한 냄새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강아지를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공격을 했고, 강아지는 사투를 벌이다가 수많은 벌침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귀여운 몸짓을 거둔 것이다.

  

   그 해 가을 아버지의 가슴에는 빈 사과궤짝만 쌓여갔다.

 

   인간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 선택의 조건은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자연은 그들의

법칙에서 예외를 두는 법이 없다.

 

    自然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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